설령 그렇다면 말이시/ 임보
한 십만원쯤
내가 그저 써도 좋을 그런
돈이 있다면 말이시
어떻게 할까,
평생 그림 한 점도 못 팔고
욕쟁이로 늙어만 간
설미(雪眉) 화백이나
잘생긴 천상병(千祥炳) 시인쯤 불러
광나루 어느께로 몰려가서
메기탕에 소주를 섞다가
그래도 몇 푼 남으면
목이 곧은 창부(唱婦) 두엇 골라
굿거리 장단으로
배를 띄워도 보고,
한 백만원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런
돈이 생기면 말이시
신혼여행도 못해 보고
불혹(不惑)에 이미 초로(初老)한
내 아내를 이끌고
수안보쯤 가서 며칠 바람을 쐬다가
그래도 남는 게 있으면
나는 슬그머니 뒷차로 빠져
점촌(店村) 새재로나 넘어
맘에 드는 산암(山庵)이라도 만나면
문득 들러 한 보름쯤
법고(法鼓)에 젖어도 보고,
한 천만원쯤
써야 할 그런 돈이
어떻게 생긴다면 말이시
어디로 갈까?
우선 남미(南美) 페루의 고원(高原)쯤으로
훌쩍 날아가서
잉카의 더운 돌에 귀도 대 보다가
아마존을 거슬러
밀림 속으로 한 두어 달 오른 뒤,
심심하면
빛깔 고운 추장(酋長)의 딸 하나 얻어
그 시린 눈동자나 들여다보면서
퉁소도 불어 보고,
한 일억원쯤
내가 써야만 하는 그런 돈이,
내 평생의 월급을 다 모아도
만들기 힘든 그런 돈이 생긴다면 말이시,
친구여,
나는 그 돈보따리를 한 이레쯤 베고
잠을 자면서 궁리하겠지
그러다가 또 한 이레쯤
뜬 눈으로 만져만 보다가
내 작은 봇장에는 담을 수 없어
미국의 어느 우주항공국 여행과에
기탁했다가,
보통 사람도 인공위성을 탈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오거든
나도 보고 싶네
천공(天空)에 떠 있는 작은 이 지상(地上)을,
허나, 친구여,
내 주머니는 항상
내가 가볍게 쓸 수 있는 것으로
겨우
골뱅이에 소주 몇 홉,
더러는
그 맑은 유리잔 속에
천공(天空)의 별들도 들어앉고,
아마존의 바람도 일렁이고,
아내의 부푼 손,
도란도란 친구들의 추운 詩도
울어 예는데……
* 이 글을 적었던 때가 20여 년 전이어서 지금(2009년) 그 액수의 돈으로는 그러한 낭만을 즐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시도 인프레의 영향을 받아 세월이 지나면 의미의 퇴색을 막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