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목마일기

설령 그렇다면 말이시

운수재 2009. 7. 20. 04:49

 

 

 

 

설령 그렇다면 말이시/            임보 

 

 

 

한 십만원쯤

내가 그저 써도 좋을 그런

돈이 있다면 말이시

어떻게 할까,

평생 그림 한 점도 못 팔고

욕쟁이로 늙어만 간

설미(雪眉) 화백이나

잘생긴 천상병(千祥炳) 시인쯤 불러

광나루 어느께로 몰려가서

메기탕에 소주를 섞다가

그래도 몇 푼 남으면

목이 곧은 창부(唱婦) 두엇 골라

굿거리 장단으로

배를 띄워도 보고,

 

한 백만원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런

돈이 생기면 말이시

신혼여행도 못해 보고

불혹(不惑)에 이미 초로(初老)한

내 아내를 이끌고

수안보쯤 가서 며칠 바람을 쐬다가

그래도 남는 게 있으면

나는 슬그머니 뒷차로 빠져

점촌(店村) 새재로나 넘어

맘에 드는 산암(山庵)이라도 만나면

문득 들러 한 보름쯤

법고(法鼓)에 젖어도 보고,

 

한 천만원쯤

써야 할 그런 돈이

어떻게 생긴다면 말이시

어디로 갈까?

우선 남미(南美) 페루의 고원(高原)쯤으로

훌쩍 날아가서

잉카의 더운 돌에 귀도 대 보다가

아마존을 거슬러

밀림 속으로 한 두어 달 오른 뒤,

심심하면

빛깔 고운 추장(酋長)의 딸 하나 얻어

그 시린 눈동자나 들여다보면서

퉁소도 불어 보고,

 

한 일억원쯤

내가 써야만 하는 그런 돈이,

내 평생의 월급을 다 모아도

만들기 힘든 그런 돈이 생긴다면 말이시,

친구여,

나는 그 돈보따리를 한 이레쯤 베고

잠을 자면서 궁리하겠지

그러다가 또 한 이레쯤

뜬 눈으로 만져만 보다가

내 작은 봇장에는 담을 수 없어

미국의 어느 우주항공국 여행과에

기탁했다가,

보통 사람도 인공위성을 탈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오거든

나도 보고 싶네

천공(天空)에 떠 있는 작은 이 지상(地上)을,

 

허나, 친구여,

내 주머니는 항상

내가 가볍게 쓸 수 있는 것으로

겨우

골뱅이에 소주 몇 홉,

더러는

그 맑은 유리잔 속에

천공(天空)의 별들도 들어앉고,

아마존의 바람도 일렁이고,

아내의 부푼 손,

도란도란 친구들의 추운 詩도

울어 예는데……

 

 

 

   * 이 글을 적었던 때가 20여 년 전이어서 지금(2009년) 그 액수의 돈으로는 그러한 낭만을 즐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시도 인프레의 영향을 받아 세월이 지나면 의미의 퇴색을 막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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