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색한 편지
임보
송 시백님, 여일하시지요?
W지에 발표하신 시 「石經」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담겨 있는 메시지도 좋았고 무엇보다 아름다웠습니다.
좋은 작품은 역시 아름답고, 아름다운 작품이야말로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된다는 사실도 새삼 느꼈습니다.
일전에 한 시지(詩誌)에서 젊은 시인들을 위해 마련한 특집을 읽어 보았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 등단한 시인 가운데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수십 명을 선별하여 개인의 대표작과 최근작 1편씩을 수록한 특집이었습니다.
뜻있는 시도라고 생각되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는데 절반쯤 읽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읽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고 느낌도 제대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내가 시대에 한참 뒤진 모양이지요?
변해 가는 세상에 미처 좇아가지 못한 듯해서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시도 변해야 되겠지요.
전시대의 유물처럼 음풍농월이나 답습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새롭게 발전해야 한다는 것엔 나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변화가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것이어야지 만일 해악을 가져오는 것이면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요즈음 젊은 시인들이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글 가운데는 난삽하여 감흥도 없고 이해도 안 된 글들이 허다합니다.
한평생 시에 몸담고 살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와 닿는다면 일반 독자들에겐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시가 재미없고 따분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점점 시를 외면하는가 봅니다.
송 시백님,
수많은 사람들의 흉금을 울리며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까닭이 어디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유시의 그 ‘자유’는 정형시의 틀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인데 ‘제멋대로’로 잘못 이해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쓰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가 봅니다.
시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글인가요?
글 가운데서도 가장 절제를 요구한 정련된 글이 아닙니까?
자유시에 형식이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정형시처럼 미리 정해진 틀이 없다는 뜻이지 작품마다 최선의 형식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유시는 그 내용에 가장 합당한 최선의 형식을 매작품마다 창조해 가는 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자유시는 사실 정형시보다 더 까다롭고 어려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유시를 멋대로 써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참 한심한 노릇이지요.
둘째로 분별없는 모방 행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초현실주의와 무의미의 시를 잘못 받아들인 경향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송 시백께서도 익히 아시듯이 초현실주의는 심층심리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유파가 아닙니까?
소위 자동기술법이라고 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이미지를 아무런 여과도 없이 토해 놓고 시라고 하지요.
김춘수 시인이 주창한 무의미시는 회화에서 비대상을 지향하는 비구상화의 의도와 같은 맥락으로 압니다.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김춘수의 무의미시들을 대하면 마치 불도저로 파헤쳐진 산하를 대한 것 같아 적막하기만 합니다.
초현실주의나 무의미의 시는 질서와 논리를 거부하고 어떤 규범이나 이념의 구애를 받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시들을 한국 현대시의 전범으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시들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이색적인 작품들에 매력을 느낀 젊은 아류들이 ‘시는 비논리적으로 써야 되는 글’로 잘못 받아들여 오늘날 이런 난삽한 글들이 시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셋째로 시정신의 퇴락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시인은 심미안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상급의 정신세계를 향유한 지식인들로 보고 싶습니다.
원초적이고 세속적인 욕망보다는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적인 욕망의 소유자들입니다.
진, 선, 미, 절조(節操), 염결(廉潔), 친자연 등을 지향하는 선비들입니다.
내 생각이 너무 낡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시인을 정신적인 귀족의 반열에 앉히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젊은 시인들 가운데 그런 청렬한 시정신을 지니고 글을 쓰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맑은 정신에서 맑은 글이 나오고 흐린 마음에서 흐린 글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송 시백님, 어떤 이는 한국의 현 시단을 놓고 시의 전성기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수천 종의 시지들이 간행되고 수만 명의 시인들이 북적대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만도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독자들은 점점 시를 떠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들까지도 시를 읽지 않습니다.
시가 재미없고 따분한 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시단을 시의 위기라고 진단합니다.
송 시백님,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현대시도 이제 정체성에 대한 이론을 모색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시를 한국시의 전범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탐색해 볼 일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의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째, 소통부재의 시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모든 글은 전달을 전제로 해서 쓰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심오한 시심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전달에 문제가 있으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가 예술작품이기를 바란다면 미적 요소와 무관해서는 곤란합니다.
내용이든 표현형식이든 간에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셋째, 감동성을 지닌 글이면 좋겠습니다.
감동성 회복이 시의 위기를 극복하는 최선의 길로 생각됩니다.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시의 생명은 길어질 것입니다.
송 시백님,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을 <우리시 진흥회>와 월간 『우리詩』에서 하고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격려와 조언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石經」과 같은 감동적인 작품 많이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문운을 빕니다.
(우리시 권두 시론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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