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수필

운수재

운수재 2012. 5. 31. 19:44

 

운수재(韻壽齋)

                                                                                             林 步

 

운수재는 내 집의 당호다. ‘운(韻)’은 운문(韻文) 곧 시(詩)를 뜻하고, ‘수(壽)’는 생명의 긺을 뜻하는 글자다. 그러니 운수재는 생명이 긴 불후(不朽)의 글을 써 보자는 야심이 담긴 좀 건방진 이름이다. 젊어서 붙였던 이름이고 보니 욕망의 혈기를 누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운수재가 자리한 곳은 삼각산 밑 산골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도봉구 쌍문동에 속하지만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북구 우이동과 나란히 접하고 있어서, 누가 어디 사는가 물으면 나는 ‘우이동’이라 그냥 대답한다. 어감이 ‘쌍문동’보다는 부드럽고 또한 세상에 더 잘 알려져 있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이 집에 이사 온 것이 1975년이니 여기에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주변머리가 없으면 그렇게 오래 한 곳에 붙박여 산단 말인가. 나와 이웃해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강남으로, 분당으로, 수지로…… 자주 이사를 거듭하면서 크게 재산을 불린 이들도 없지 않다. 아내는 우리도 그랬으면 좋았을 걸 하고 가끔 아쉬워도 하지만, 게으른 사람이 자주 이사 다니며 돈 벌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운수재를 오래 떠나지 못한 것은 내 게으름의 탓도 있지만 이 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솔밭에 집을 지어 몇 그루의 소나무가 뜰에 서 있는 것도 운치가 있고, 옥상에 올라서면 인수(仁壽), 백운(白雲), 만경(萬景) 등 삼각산이 바로 눈앞에 건너다보일 뿐만 아니라, 멀리 오봉(五峰)이며 도봉(道峰)까지 바라다볼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손수 뜰에 심어 기르는 감나무며 매화나무 그리고 모란 들과 더불어 사는 일이 여간 즐겁지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서울의 한적한 이 변두리도 차차 변해 갔다. 길도 바뀌고 길 주변의 건물들도 키를 높였다. 운수재의 주변도 많이 달라졌다. 좌우에 있던 낮은 집들이 4, 5층 건물들로 솟아오른 바람에 운수재는 그만 높은 집들 사이에 넙죽 묻혀 버렸다. 그리하여 주위에 병풍처럼 둘려 있는 맑은 북한산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요즘 들어 더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소나무들이 서 있던 집 앞 공지에 새로운 공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 묵은 노송들을 얼마 전에 파 옮겨 가더니, 매일 뚝딱거리는 소음과 함께 먼지를 뿜어대며 콘크리트 집을 짓고 있다. 수십 세대를 수용하는 고층 빌라가 들어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유일하게 트여 있는 운수재의 남쪽 하늘도 답답하게 막히고 말 것이다. 조망권을 잃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햇볕도 들지 않아 뜰에 고추며 상추 같은 푸성귀를 심어 먹던 일도 이젠 그만 둬야 한다. 수십 년 공들여 키워 온 감나무며 매실나무도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5월이면 천사처럼 맑은 백모란의 환한 꽃송이를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잃게 되리라. 이러한 정황을 생각하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머잖아 운수재도 어디론가 옮겨가야 할 운명에 놓인 것 같다. 남들처럼 벌집 구멍 같은 아파트에 기어들어가 시멘트 냄새나 맡으며 벌레처럼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교외에 나가 전원을 가꾸며 살 만큼 기력을 지닌 나이도 아니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타의에 의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수몰민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집은 단순히 먹고 잠을 자는 공간만이 아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편안케 하는 안식처이어야 한다. 비록 비싼 땅에 고급 자재로 호화롭게 지은 집이라 할지라도, 비록 고량진미(膏粱珍味)에 능라금의(綾羅錦衣)를 걸치며 화사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가 사는 집이 영육을 불편케 한다면 좋은 집일 수 없다. 맑은 공기며, 밝은 햇볕이며, 시원한 조망이며, 소음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다정한 이웃이며……. 좋은 집의 조건은 내적인 것보다 오히려 외적인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나는 오래 전에「운수재」라는 제하에 아래와 같이 노래한 바 있다.

 

풋고추 날된장에 매실주 말술[斗酒]

수석(壽石), 송죽(松竹)에 문방사보(文房四寶) 짊어지고

삼각산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한평생

어느 제 가락 얻어 인수봉을 오르리

 

매실주 앞에 놓고 삼각산 바라보며 수석과 더불어 먹을 희롱하며 유유자적 흘러온 것이 40년이다. 내가 만일 삼각산 밑을 떠나게 된다면 이 노래도 부질없는 허사(虛詞)로 남게 될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인수봉과 겨룰 긴 가락을 얻는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될 것만 같다.

                                                                                          --(에세이21, 201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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