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에 서서 / 임보
지난 이른 봄에
친구 따라 팔도 명승지를 돌면서
내가 얼마나 산과 물을 모르고 살았던가
무척 부끄러워했다.
지난여름엔
우이동(牛耳洞) 숲속을 혼자 헤매면서
내가 얼마나 저 수목들의 이름에 눈이 어두운가
심히 뉘우치기도 했다.
지난가을엔
내 집 뜰 한 귀퉁이에서
시들어 가는 이름 모를 풀잎을 보며
그놈이 한해살이인지 여러해살이인지 몰라
못내 안타까와도 했다.
그런데 이 겨울
저 눈밭에 나가 서 보고
내가 살았던 한 해가 얼마나
헛된 것이었던가를 드디어 보았다.
그놈들이 무슨 이름을 달고 있든
내가 그놈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공연히 쓸데없는 데 마음을 쓰면서
한 일 년 허송세월한 것을
비로소 보았다.
---시집 <은수달 사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