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나의 스승님들

운수재 2013. 9. 5. 06:10

 

나의 스승님들

                                                                              임보

 

 

내 생애의 첫 스승은 조부님(後隱 姜泰秀)이시다.

나는 네댓 살 되던 때부터 조부님 사랑에서 함께 기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분은 내가 말을 익히기 시작하자 한문을 가르치시었다.

나의 첫 교재는 『추구(推句)』였는데 이는 역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서 뽑아 엮은 시집이다.

지금도 다음의 구절은 내 뇌리에 남아 반짝이고 있다.

 

狗走梅花落(구주매화락) : (개가 달려가매 매화꽃이 떨어지고)

鷄行竹葉生(계행죽엽생) : (닭이 걸어가매 댓잎이 돋아나는도다)

 

눈 덮인 마당 위에 생겨난 개와 닭의 발자국을 매화꽃과 댓잎에 비유한 것인데 당시의 어린 나에게 글이란 참 아름답고 신기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내가 한평생 시를 가까이 하며 살게 된 것도 일찍이 조부께서 익혀 주신 몇 구절의 시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겨울밤/ 대수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 깨어 먹을 가시던 그 분/

그런데 어인 일로/ 그가 내 손에 남기신 묵적(墨蹟)은/ 단 두 편의 시/

그것도 파지에 적어/ 책갈피에 꽂아 둔 초고인 걸 보면/

이렇게 남게 된 것도/ 당신의 뜻은 아니었던 모양//

나는 그 분의 유묵 몇 점 못 간직한 것이/ 두고 두고 서운키만 했는데/

오늘 아침 내 나이 천명(天命)에 들면서/ 이제야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 등 뒤에 숨어서 소곤대는/ 그 소리를 비로소 들었다./

지상의 흔적 다 거두어 떠나려 했던/ 후은(後隱)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겨우 백여 년 내다보고 사는데/ 수만 년 유유(幽幽) 속에서 소요했던/

그 분을…….

――졸시 「후은시(後隱詩)」부분,『황소의 뿔』(1990)

 

두 번째 내 문학의 스승은 중학교 때 만난 인촌(人村) 정동렬(鄭東烈) 선생님이다.

나는 인근에 새로 설립된 주암중학교에 진학했는데, 2학년 때 이마가 훤칠하게 벗겨진, 짙은 갈색 안경의 멋쟁이 젊은 체육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그 체육 선생님은 운동장이 아닌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주로 세계명작소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테스』『부활』『죄와 벌』 같은 흥미진진한 소설의 스토리를 선생님을 통해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선생님의 전공은 체육이 아니라 국어였는데 우리 학교의 빈 체육교사 자리를 채우기 위해 임시로 오셨던 것 같다.

한국전쟁 직후 당시의 교육행정이 얼마나 어수룩했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 선생님께 홀딱 빠진 나는 방과 후 선생님의 숙소에 찾아다니며 선생님이 소지한 문학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소월이며 미당 청록파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며 시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인촌 선생은 1년쯤 뒤에 당신의 전공을 찾아 다른 학교의 국어교사로 떠나셨는데 그때부터 선생께서는 편지를 통해 나를 가르치셨다.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선생님의 편지에 답신을 쓰기 위해 날을 새기고 했다.

선생께서 구사하신 미려한 문체와 멋스런 필체를 본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지금의 내 필체에는 아직도 그분의 것이 남아 있다.

 

1952년 어느 봄날/ 전라남도 승주군 주암면 창촌리 산골에/

짙은 갈색 안경에 검은 베레모를 쓴/ 바람의 신 같은 젊은 청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아무 물정도 모르는/ 열네 살의 어린 한 소년에게 바람을 넣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도 아니고/ 억만 금을 거머쥔 거부도 아니고/

천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도 아니고/ 한 자루의 아름다운 펜을 가진 사람이다

―졸시 「바람의 스승」부분 『눈부신 귀향』(2011)

 

세 번째의 선생님은 유상(愉象) 유공희(柳孔熙) 선생님이다.

호남의 수재들이 모인 광주고등학교에는 선생님들 또한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셨다.

그 가운데서도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분이 국어를 담당하셨던 유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교과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인생과 문학과 철학을 말씀하셨는데, 보들레르를 위시해서 랭보와 발레리 등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에 대한 얘기며, 사르트르, 까뮈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 그리고 『생활의 발견』의 저자인 생의 철학자 린위탕(林語堂), 『사랑과 인식의 출발』의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등을 소개해 주시기도 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렇고, 세상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여유로운 자세를 배운 것도 바로 그분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수필을 잘 쓰셨는데 당신 생전에 문집 갖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신 맑은 선비셨다.

그래서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몇 해 뒤에야 유고시문집 『물 있는 풍경』(시학, 2008)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네 번째 스승은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시인이시다.

내가 다형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광주의 한 신문사가 주관한 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내 시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때의 심사위원이 조선대학교 교수였던 다형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광주 양림동에 자리한 다형 댁엘 가끔 드나들었다.

시에 대한 말씀을 기대하면서 찾아가지만 선생님은 별로 말씀이 없었다.

마른 볼에 유난히 큰 귀가 마치 선량한 사슴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말 주변이 없었던 터라 한동안 멍청히 앉아 있다가 그만 물러나오곤 했다.

내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1958년 무렵, 다형도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옮겨오면서 수색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20여 평의 조그만 반양옥집이었는데 다형의 조촐한 방엔 손수 끓인 원두커피의 향기가 늘 가득했다.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지만 술과 담배를 전혀 가까이하지 않는 청교도적인 청정한 삶을 살았던 분이다.

 다형의 성품은 대쪽같이 강직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함부로 그분을 대하질 못했다.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59년 10월에 다형께서는 나의 「자화상」을 《현대문학》에 처음으로 추천해 주셨다.

두 번째 추천작 「거만한 상속자」는 1961년 11월에 그리고 마지막 추천작 「나의 독재」는 1962년 7월에 통과될 수 있었다.

세 번의 추천을 거치는데 3년 가까이 소요된 셈이다.

 

가을/ 볕바른 다실(茶室)에 앉으면/

차(茶), 그 투명의 향기에/ 부활하는 다형(茶兄).//

고독,/ 그 마른 정결로/ 뭉친 이마,/

늘/ 천상의 음계를 더듬어/ 크게 열려 있던/ 사슴의 귀,//

다만/ 한 잔의 뜨거운 커피에만/ 관용턴 입술,//

세상을/ 굳은 눈썹으로/ 재고 갔던/ 청교도,//

홀로/ 곧게 걷던/ 금강석의/ 시인.

―졸시 「다형(茶兄)」『목마일기(木馬日記)』(1987)

 

다섯 번째의 스승은 대학의 은사님들이다.

대학에 들어와 보니 네 분의 교수들이 계셨다. 일석(一石 李熙昇)과 심악(心岳 李崇寧) 그리고 백영(白影 鄭炳昱)과 백사(白史 全光鏞)였다.

그런데 어학 파트의 두 원로 교수가 주도를 하고 있어서 문학 쪽은 힘을 못 쓰고 있었다.

더욱이 이숭녕 교수는 창작에 뜻을 두고 있는 학생들을 불량배 취급을 했다.

그분의 말씀은 문리과대학은 학문하는 학자를 양성하는 곳이지 작가를 기르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학과의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글 쓰는 데 관심을 가지고 들어왔던 학생들도 생각을 바꾸어 어학이나 국문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20명의 입학 동기 가운데 창작의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틴 학생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의붓자식처럼 외톨이로 굴러다녔다.

소설을 쓰신 전광용 교수가 그나마 나를 다독여 주셨다.

그래서 그랬든지 대학에 들어온 후로는 시보다 소설 쪽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61년 대학신문에 단편소설 「비(碑)」가 당선되기는 했지만 신춘문예의 관문을 뚫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의 목청은/ 겨울 청댓잎 스치는 바람으로/늘 살아 있었다.//

남해(南海) 먼 바다 흑산도(黑山島)를/마흔 나이에/ 등으로 져 끌어올리더니//

숨은 국초(菊初)의 멱살을 붙들어/세상의 밝은 햇볕에/ 올려 놓았다.//

예술과 학문을 함께 메고/이 땅의 청사(靑史) 새롭히겠다고/

천하(天下)를 갈던 백사(白史),/욕심 많은 북청(北靑)분네.//

오늘/ 고희(古稀)에 앉아서도/그 푸른 목소리로/ 청댓잎을 흔들고 있다.

――「백사시(白史詩」전문 『은수달 사냥』(1988)

 

그리고 내 마지막 스승은 운정(芸丁) 정완섭(鄭完燮) 선생이시다.

이당(以堂)의 문하인데 내가 학원의 강사로 인사동에서 떠돌고 있을 때, 가끔 이분의 화실에서 문인화의 운필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일찍 세상을 뜨시어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내게 묵향의 운치를 일깨워준 분이다.

내 안방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얻은 운정의 그림이 걸려 있다.

삼베에 그린 두 폭의 금강산도인데 바라볼 때마다 과묵하고 온건한 그분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이켜 보면 나는 훌륭한 스승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아무도 안 계신 지금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그분들 생전에 좀더 응석을 왜 못 부렸던고 하는 것이다.

                                                          

                                                                                     ----[바보 이력서]<유심> 2013. 9월호--------

 

 

 

 

 

'임보의 산문들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에 대한 내 생각  (0) 2013.09.07
나의 동인 활동  (0) 2013.09.06
나의 이름에 관하여  (0) 2013.09.04
물권사상(物權思想)  (0) 2013.07.07
도원은 어디 있는가  (0) 2013.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