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도(篆刻刀)
임보
내게 전각도 한 벌이 있다
전각을 하는 친구가 있어 권하는 바람에
젊은 날 멋모르고 마련했던 것인데
몇 번 시도해 보다 그만 두었다
나무에 도장을 새겨본 경험도 없는 내가
아니, 종이에 붓글씨도 제대로 못 쓰는 내가
칼로 돌에 글자를 새기려 들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욕심이란 말인가?
작은 손아귀에 악력도 약해서 그런지
돌도 칼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칼을 대면 돌이 황소의 뿔처럼 받았다
칼을 쥔 내 손이 그만 부르르 떨렸다
나는 길게 버티지 못하고
돌과 칼의 기세에 눌려
그만 나뒹굴고 말았다
완전한 KO 패를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일찌감치 그만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석각(石刻)에 맛을 붙여 계속 칼질을 해 왔다면
이 또한 백정의 신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학창시절 내가
평생의 진로를 놓고 망설일 때에
법과 대신 문과를 택했던 것처럼
참 아슬아슬했던 일이다
내 전각도는
젊은 날의 부질없는 내 욕망을 베어내고는
제 구실도 못해 본 채 서랍 안에 갇혀
긴 동면 속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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