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전각도(篆刻刀)/ 임보

운수재 2015. 3. 28. 10:36

 

전각도(篆刻刀)

                                          임보

 

내게 전각도 한 벌이 있다

전각을 하는 친구가 있어 권하는 바람에

젊은 날 멋모르고 마련했던 것인데

몇 번 시도해 보다 그만 두었다

 

나무에 도장을 새겨본 경험도 없는 내가

아니, 종이에 붓글씨도 제대로 못 쓰는 내가

칼로 돌에 글자를 새기려 들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욕심이란 말인가?

 

작은 손아귀에 악력도 약해서 그런지

돌도 칼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칼을 대면 돌이 황소의 뿔처럼 받았다

칼을 쥔 내 손이 그만 부르르 떨렸다

 

나는 길게 버티지 못하고

돌과 칼의 기세에 눌려

그만 나뒹굴고 말았다

완전한 KO 패를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일찌감치 그만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석각(石刻)에 맛을 붙여 계속 칼질을 해 왔다면

이 또한 백정의 신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학창시절 내가

평생의 진로를 놓고 망설일 때에

법과 대신 문과를 택했던 것처럼

참 아슬아슬했던 일이다

 

내 전각도는

젊은 날의 부질없는 내 욕망을 베어내고는

제 구실도 못해 본 채 서랍 안에 갇혀

긴 동면 속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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