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문방사보/ 임보

운수재 2016. 1. 7. 07:43

 

문방사보

                                          임보

 

예로부터 선비들이 소중히 여기는 필기도구

곧 지(종이), (), (), (벼루)

문방사보(文房四寶) 혹은 문방사우(文房四友)

불러 오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풍조가 바뀌어

연필, 만년필, 볼펜, 자판(字板, 키보드)이 등장하자

옛 사보들은 밀려나고 새 사우가 들어앉는데

컴과 폰 그리고 프린터와 종이라고나 할까?

(종이는 아직 근근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

 

내 방에도 신흥 문방사우가 자리를 잡고

기세 등등 텃세를 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한 귀퉁이엔 아직도 옛 사보가 도사리고 있다

(주인의 각별한 배려로 버티는 중)

 

먼지 앉은 초라한 그놈들 보기가 딱해

가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을 적셔 주기도 한다

그윽한 먹의 향기

부드러운 화선지에 스며드는 먹물이

긴 세월 떨어져 있던 낭군을 만난 신부처럼

서럽게 젖어든다

 

때로는 댓잎을 세워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노송을 심어 달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래도 마음 내키지 않으면

강산을 끌어들여 천지를 농락키도 하지만

 

그러나 필묵이여!

나도 너처럼

흐르는 세파를 거슬러 오를 수는 없어

연적(硯滴) 곁에 매문주병(梅紋酒甁)을 놓는다

 

(시와 정신 2015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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