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포엠(In-Poem)
임 보
나는 요즘 줄을 타고 바깥나들이를 한다/
한 개의 작은 줄이 세상으로 나가는 내 문!//
컴의 자판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세상과 만난다/
아침 일찍 메일함을 열어 편지들을 점검하며/
광고들은 지우고, 의례적인 글은 의례적으로/
은밀한 사연은 은밀하게 답신을 보낸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가 내게 온 댓글들을 확인하고/
새로 올라온 글들을 골라 읽으며/
괜찮은 글들에겐 댓글을 달아 준다//
그 다음엔 페이스북으로 건너가서/ 짧은 내 시 둬 편을 올린다/
시의 내용과 어울리는 이미지를 검색하여/
양념으로 덧붙이는 서비스를 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좋아요’가 몇 개나 오르는지/
댓글이 몇 개나 붙는지 들랑날랑 살펴본다/
반응이 좋으면 기분이 업 되고/ 반응이 별로면 기분이 시들해진다/
(이 나이에 이 무슨 체통 잃은 작태인가!)//
페북의 내 친구들은 5,000명 상한선에 가깝지만/
매번 내 글에 표를 던지는 친구는 겨우 80명 내외/
하지만 이들을 저버릴 수 없어/
세상이 별로로 여긴 ‘시’라는 글을 매일 바친다//
시도 재미있는 글임을 천하에 알려/
죽어 가는 시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꿈을 꾸며/
허약한 시들을 허공에 열심히 날리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쪼그려 앉아 작은 줄 하나 붙들고/
이 풍진 세상과 열심히 내통하고 있다//
― 졸시 「온라인」전문
졸시 「온라인」이다. 하루의 적지 않은 시간을 PC 앞에 달라붙어 지내는 내 몰골을 빈정대는 글이다.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을 하나 선택하라면 아마도 PC나 스마트폰을 들 것이다. 이들이 그처럼 인기가 있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무진장의 자료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 문학, 예술, 오락 등을 위시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정보들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가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에 빠져 있나 보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 20c까지를 인쇄매체가 지배한 종이의 시대라고 한다면, 21c 이후는 인터넷이 지배하는 선(on-line)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공동의 생활권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소식을 우리는 거의 같은 시간대에 접하며 살아간다. 소위 SNS를 통해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개인정보들의 홍수 속에 떠밀려 간다고나 할까. 그 개인정보 속에는 ‘시(詩)’라는 이름의 글들도 중요한 자리를 점하며 도도히 흐르고 있다. 나는 인터넷 상에 떠도는 시들을 인쇄매체를 통해 유통된 기존의 시와 구분하기 위해 ‘인터넷 시’― 즉 ‘인-포엠(In-Poem)’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한국은 시인 공화국이다. 수만 명의 시인들이 매일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면서 북적대며 살아간다. 매월 수천 종의 시지(詩誌)들이 간행되고 수천 권의 시집들이 출간된다. 그러나 막상 시를 읽는 독자들은 별로 많은 것 같지 않다. 대형 서점에 시집코너가 사라지고 베스트셀러 반열에 시집들이 끼지 못한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시의 생산자는 많은데 시의 소비자는 빈약한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도대체 왜 시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가? 나는 그 요인을 다음의 몇 가지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첫째, 책을 읽지 않은 풍토가 형성되고 있다. 정보를 책에서 구하지 않고 컴이나 스마트폰에 의존하게 되어 독서습관이 바뀐 것이다.
둘째, 음악 만화 영화 등을 위시해서 시가 재미있는 타 장르들에게 밀려났다.
셋째, 시가 소통부진의 난삽하고 저급한 언어구조물로 변질했다.
이런 사회적 여건하에서 일반 독자들이 재미 없고 답답한 시를 읽으려 들지 않을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시인들의 시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모르니 이 또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시라는 이름의 많은 글들 소위 ‘인-포엠’들이 넘쳐나고, 곳곳에서 시낭송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은 선천적으로 시에 대한 애정과 재능을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전철역의 스크린 방호벽에 시가 걸린 것이라든지, 거리나 공원에서 시목(詩木)과 시비(詩碑)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이 다 우연의 소치만은 아닐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리지도 않은 시를 쓰겠다고 시에 덤벼드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시단(詩壇)도 이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될 것 같다. 등단의 관문을 통과한 소위 기성시인 중심의 시단의 벽이 서서이 무너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 자유시라는 글은 그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한 인터넷의 열린 공간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발표할 수도 있다. 그러니 ‘시인’이라는 인정을 굳이 받을 필요도 없이 아무나 발표의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의 글이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게 되면 자연이 유능한 시인으로 인정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시인과 아마추어의 간격이 사라져 가고 있다. 언젠가는 아마추어들이 주도하는 인-포엠이 한국시의 주류를 이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쏟아져 나온 인-포엠의 글들을 자유방임의 상태로 그냥 방기할 것인가?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다. 가급적이면 시의 격(格)을 지닌 글이 되도록 시단이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인-포엠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좋은 글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소망을 당연히 갖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면 바람직한 인-포엠의 특정은 어떤 것일까? 다음은 평소 내가 생각해 본 몇 가지 항목들이다.
첫째, 간결할 것. (현대인은 긴 분량의 글보다는 짧은 분량의 글을 선호하리라 본다.)
둘째, 흥미로울 것. (재미 없는 글에 관심을 가지고 참고 읽어 줄 사람은 없다.)
셋째, 아름다울 것. (시를 예술작품이게 하려면 미적 요소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넷째, 여운을 지닐 것. (읽은 뒤에 마음속에 남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내가 그 동안 시도해 온 ‘사단시(四短詩, 네 마디 짧은 시)’ 가운데서 몇 편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면구키는 하지만, 앞에 제시한 인-포엠의 특성을 지닌 적절한 예가 혹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늦게 핀 꽃이/ 더 귀하고 곱다/ 그대여,/ 아직 늦지 않다
― 졸시 「꽃에게」전문
벌의 덕분에 호사로다/ 이 눈부신 봄날/ 모르핀처럼 스며드는/ 저 알싸한 향기
― 졸시「수수꽃다리」전문
돌이켜 보니/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말만/ 배우다 말았다
― 졸시「한평생·2」전문
선거에 뛰어든 무모한 아들을 두고/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저놈이 안 되면 집안이 망하고/ 저놈이 되면 나라가 망하고……
― 졸시「진퇴양난」전문
재미와 아름다움을 지닌 인-포엠이 네티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간다면 대중들의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질 것이다. 시가 까다롭고 따분한 글이 아니라 흥겹고 위로를 주는 글이라고 여겨진다면 시를 떠났던 독자들이 다시 시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시집들이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한국의 시가 K-Pop처럼 K-Poem의 새로운 한류물결을 만들며 세계로 뻗어가게 될지 누가 아는가.
(2016년 우리시 5월호 권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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