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네 번째 단계
― 방시(放詩)에 관하여
임 보
나는 <시와 말[馬]>이라는 에세이를 쓴 바 있다. 글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나그네가 먼 여행길을 혼자 가던 중에 광야에서 버려진 말[馬] 한 마리를 발견한다. 심심하던 차에 말을 만난 나그네는 말과 동행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한동안 말을 길들인 다음 말과 함께 나란히 길을 떠난다. 그렇게 얼마나 갔든지 지친 나그네가 힘들어 하자 말이 나그네에게 속삭인다. “주인님 내 등에 올라타세요!”라고 이른다. 그래서 나그네는 망설이다가 말의 등에 올라타게 된다. 올라타고 보니 말의 등 위에서 바라다본 세상은 몸소 걸어갈 때와는 전혀 달랐다. 멀리 트이는 시야와 더불어 뒤뚱거리는 풍경이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이 글은 시인과 시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즉 나그네는 시인이고 말은 시를 상징한다. 시인이 시를 만나 거들먹거리며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 이야기를 나는 아래와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피력하였던 것이다.
1) 멱시(覓詩)의 단계 : 시가 뭔지 궁금하여 호기심으로 시를 찾는 처음의 단계. 이때는 시가 시인보다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시인)
2) 견시(見詩)의 단계 : 시를 만나 시를 알게 되며 시를 친구로 사귀는 단계로 시인과 시가 대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시=시인)
3) 역시(役詩)의 단계 : 시인이 시를 하인처럼 부리는 단계로 시와 더불어 즐겁고 흥겹게 지낸다. 시인이 시의 상위에 자리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시<시인)
내 글 <시와 말>은 위의 세 단계를 지적한 것이다. 도교나 불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소를 찾는 설화 심우도(尋牛圖)가 있다. 깨달음 내지는 자신의 본성을 소에 비유해서 밖에 나가 소를 찾아서 집에 돌아오는 정황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쩌면 두 비유가 유사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앞의 <시와 말>에서 언급한 시의 세 단계의 끝에 한 단계를 더 추가하고 싶어서이다. 추가하고 싶은 네 번째 단계는 타고 가는 말에서 내려서 이젠 말을 내보내는 마지막 단계다. 그러니 시로 말하면 방시(放詩)― 즉 시를 버리는 단계다. 방시는 시인이 시를 놓아주는― 달리 말하면 시를 떠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쓰고는 싶은데 기력이 달려서 못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초연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노년에 이르러 시를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즉 못 쓰는 경우와 안 쓰는 경우다. 쓰고 싶은데 힘이 달려 못 쓴다면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쓰는 일이 부질없다고 생각되어 쓰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보통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서슬 푸른 위의(威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 입문하기도 쉽지 않지만 시를 떠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집을 떠나는 일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시인은 말년에 많은 작품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인은 일찌감치 시업을 작파하고 한가하게(?) 지내는 이도 있다.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도 고와 보이지 않지만 너무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시인이 시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스럽게 붙들고 있는 태도는 안쓰러워 보인다. 감성이 마르고 기운이 부치면 놓아주는 것이 선비다운 자세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이른 나이에 일찌감치 시업을 작파하고 빈둥거리며 지내는 이들 또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성실성이 부족한 게으른 사람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는 싶은데 기력이 부쳐 못 쓴다면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시적인 감성 속에 살아간다면 이는 시의 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옛 선비들이 나이 들어 벼슬길을 스스로 물러나는 치사(致仕)의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시를 떠나는 방시(放詩) 역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글의 추함을 보이기 전에 스스로 붓을 놓는 결단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의연(毅然)한 일이겠는가?
시를 잘 쓰기도 어렵지만 시를 잘 놓아 주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버리는 일도 준비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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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 387호 권두에세이 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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