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4 / 임보
14.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시 본격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서사시(敍事詩)라는 장르가 있지만, 분량이 길지 않는 서정시도 짧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어쩌면 이야기 형식이 독자를 설득하는데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민들레가 민들레 씨에게」(『날아가는 은빛 연못』시와 시학, 1994)의 화자는 엄마 민들레다. 깃을 달고 미지의 세상으로 날아갈 자식 민들레에게 들려주는 당부의 말이다. 이는 작자인 내가 후손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아들아 바람이 오거든 날아라 아직 여린 날개이기는 하지만 주저하지 말고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라 이 어미가 뿌리내린 거친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가거라 그러나 남풍에는 현혹되지 말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따스하지만 너를 차가운 북쪽 산비탈로 몰아갈 것이다 북풍이 오거든 때를 잃지 말고 몸을 던져 바람의 고삐를 붙잡으라 비록 그 바람은 차고 거칠지라도 너를 먼 남쪽의 따뜻한 들판에 날라다 줄 것이다 아들아 살을 에는 그 북풍이 오거든 말이다 어서 나를 떠나거라 네 날개가 시들어 무디어지기 전에 될수록 높이 솟구쳐 멀리 날아라 가노라면 너의 발아래 강도 흐르고 호수도 고여 있을 것이다 그 강과 호수에 구름이 흐르고 숲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 그 환상의 유혹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멀리 멀리 날아라 너의 날개가 다 빠지고 너의 몸이 다 젖어 더 날을 수 없을 때 네 눈앞에 햇볕 따스한 들판이 보이거든 그곳에 내려라 그러나 아들아 거친 숲들의 마을은 피하거라 지금은 외롭고 삭말할지라도 인적 없는 조용한 들판 우리들의 키보다 낮은 들풀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을 찾으라 네가 처음 발붙이기에는 그래도 아직 그들의 인심이 괜찮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처음 발 디딘 땅이 물기 어린 비옥한 흙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지금껏 비어있는 좋은 땅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라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이웃들의 틈에 네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들아 인내와 겸손으로 새로운 이웃들의 이해를 얻도록 해라 어떤 이웃은 너의 발등을 밟고, 너의 등을 밀어내고 너의 팔을 비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만 다 거친 것은 아니어서 어떤 이웃은 폭풍이 올 때 그들의 품에 너를 감싸주기도 하고 사나운 벌레들이 접근해 올 때 독을 뿜어 그들을 내쫓기도 할 것이다 아들아 네 이웃이 내게 어떻게 대하든 너는 그들을 사랑하며 참고 견디어 튼튼한 뿌리를 내리도록 해라 어느 날 밤 봄비를 맞아 네 키가 나만큼 자라면 다음 날 아침 네 이웃들의 낮은 어깨 위에 우뚝 솟아오른 너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바로 네 이웃에 네 또래의 민들레 아가씨가 방글거리며 웃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들레 아가씨가 주위에 보이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기다리노라면 내일 아침쯤 아니 언제쯤엔가는 너처럼 그렇게 날아서 네 곁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거든 아들아 서로 사랑하여라 하늘의 별들이 으스러지도록 사랑하여라 그리하여 너도 어른이 되어 예쁜 민들레씨들을 가지게 되면 나처럼 그렇게 너도 일러주거라 북풍이 오면 어서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따뜻한 새 세상 찾아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이것이 생명의 길이란다. 어떤 화가는 자식들에게 이 작품을 직접 읽어 주기도 하고, 또 어떤 교수는 강의의 첫 시간에 제자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는 쉬운 작품이어서 설득력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한강이여」(『겨울, 하늘소의 춤』작가정신, 1997)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한강’을 청자로 설정하여 쓴 글이지만 이 강토의 구원한 존재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찬미하며 조국의 번영을 기원하는 글이다. 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인데, 아직 세상의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한강이여 한강이여, 그대의 입술에 혀를 대면 멀리 남으로 태백(太白)의 어느 산기슭 자작나무 잎새에 서린 한 방울의 영롱한 이슬― 멀리 북으로 내금강(內金剛)의 그윽한 산골짝 너도밤나무의 맑은 뿌리 끝에 열린 한 방울의 감로수도 이렇게 황홀히 스며들어 나를 설레게 하는구나 한강이여, 그대의 심장에 귀를 기울이면 태평양의 바다 밑 깊은 지층을 타고 몇 만 년을 흐르던 태고의 물줄기가 동해를 넘어오다 드디어 설악(雪岳)의 등뼈를 뚫고 솟아오른 한 줄기 용천수의 고동소리도 들리나니 혹은 시베리아로 오세아니아로 무변의 하늘을 몇 천 년 바람 따라 떠돌던 태초의 성운(聖雲)이 오대산(五臺山) 봉우리에 잠시 머물다 천둥 번개로 쏟아져 내린 소나기의 그 함성도 메아리치는구나 한강이여, 그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위례성(慰禮城)으로 한양(漢陽)으로 서울로 흘러온 이 땅의 5천 년 옹이 박힌 그대의 발바닥도 서럽구나 되놈들의 말굽소리 왜놈들의 조총소리 그리고 그 무덥던 6월의 포성 우리가 뿌린 선혈 한으로 남아 그대 머리 위에 붉은 노을로 그렇게 아직 타고 있구나 그러나 한강이여, 장하기도 하다 일만의 계곡과 일만의 들판에 억조창생 가득 싣고 천만 년 달려온 그대, 대지의 젖줄 생명의 끈이여 이제 드디어 그대의 보금자리 이 서울의 들판에 천년을 기다려 온 배달의 문화 온 세계가 눈길을 쏟을 민족의 꽃을 피우리니 내일 2000년의 아침엔 서울이 세계의 심장으로 고동치고 한강 바로 당신이 오대양 온 천하를 푸르게 푸르게 태우리라. 이 작품은 20세기 끝 무렵에 쓴 글인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작품 속의 기원처럼 세계의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만큼 장족의 발전을 했으니 참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노래」(『은수달 사냥』문학세계, 1988)는 천하 만물의 모든 존재가 다 한 몸이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상을 노래한 것이다. 죽음이 이별인 것 같아 애통해 하지만 길게 보면 하나가 되어 가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고 원수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다 한 몸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과 통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나’의 노래 사랑이여, 어이할거나 그대 이 지상의 절대여 어이 떨어져 갈거나 내 곁에 그대가 묻혀도 그대 곁에 내가 묻혀도 우리들이 흩어져 가는 길 서로 다르고도 멀고나 내가 혹 잣나무 뿌리로 스며 지상에 오르면 그대는 멧새의 눈물 한 방울로 하늘을 날까? 내가 혹 남한강 물결 속에 젖어 바다로 바다로 흐를 때 그대는 아침 안개로 강물을 핥다 구름으로 떠날까? 하지만, 나도 나를 모르거늘 그 멧새, 그 안개 내 어이 부르리 사랑이여, 이 영겁의 이별 어이 슬퍼 맞으리 아니로다 그렇지 않구나 사랑이여, 우리는 처음 하나에서 그렇게 왔듯이 하나로 다시 돌아가는구나 내가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묻히고 그대가 서장(西藏) 고원의 어느 계곡에 묻혀도 우리들이 가는 길은 같구나 보라, 한 억만 년쯤 지나다 보면 우리가 쏟은 피와 살 흩어지고 흩어져 온 바다와 온 들판에 가득하리니 그대 속에 내가 스미고 내 속에 그대가 스며 온 세상이 바로 우리, 하나가 아닌가? 원수여, 우리도 한 몸이구나 내 사랑처럼 그렇게 한 곳에서 왔다 내 사랑처럼 그렇게 한 곳으로 돌아가는 한 몸이구나, 한 몸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았는가? 욕심이로다, 이 지상의 것들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 그것이 우리를 눈멀게 했도다 저 들판을 달리는 짐승들이여, 하늘을 나는 뭇 새들이여, 숲이여, 잡초여, 벌레들이여, 아니, 무한 성운(星雲)의 빛이여, 우리는 모두 하나 한 곳에서 왔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하나 우리는 곧 이 세상이로다 사랑이여, 너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면 원수요 원수여, 너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면 사랑이로다 우리는 하나요 영원이로다. 곧 스러지고 말 지상의 것들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여 세상을 이처럼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 같은 처지의 외롭고 소중한 존재들이 아닌가? ----------------------------------------------------------------------------------- * <우리시> 2021, 1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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