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 강좌

[시창작강좌 28] 역설의 시법

운수재 2006. 1. 10. 10:35

[제28신]


역설의 시법 /  임보



로메다 님,
그동안 감춤의 시적 장치인 은유와 상징 그리고 전이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불림의 시적 장치 중의 하나인 역설(逆說)에 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수한 우리말의 '불림'은 과장(誇張) 지향성을 의미합니다.
사실에 가깝도록 표현하고자 하는 산문과는 달리
시에서의 표현은 사실보다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에서는 과장된 표현이 적지 않습니다.

    白髮三千丈  흰 머리털 삼천 발
    緣愁似個長  시름 때문에 이처럼 자랐구나
    不知明鏡裏  알 수 없구나, 거울 속 저 사람
    何處得秋霜  어디서 그 가을 서리 얻었는가
        ―이백(李白) 「秋浦歌」일부


늙음을 한탄하는 이백의 시인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긴 백발을 두고
삼천 발이라고 표현했으니 실로 대단한 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두고도 알 수 없다고 말한 것 역시 과장입니다.
시에서는 이처럼 과장이 능사로 구사됩니다.
물론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이러한 직접적인 과장법 외에도 시에서 즐겨 구사되는 역설(逆說) 역시 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설은 논리적인 모순을 담고 있는 언술입니다.
그러나 시에서의 역설은 논리를 뛰어넘는 가운데 진실을 드러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설법입니다.
우선 시의 역설에 관한 다음의 글을 읽어보도록 하십시다.


역설(逆說)의 구조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지닌 진술이다.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함성'이니 '사랑의 증오'니 '군중 속의 고독'이니 하는 등의 소위 모순어법(oxymoron)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런데 이 역설은 겉으로 보기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을 지닌 언술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물의 핵심을 짚어 의표를 찌르는 함축된 발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역설을 '모순되는 두 사실의 대응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달음을 계시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특히 시에서는 이 역설적 발언이 널리 원용되고 있다.
C. Brooks는 현대시의 구조를 아예 '역설(paradox)'로 파악기도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부분

 이 시의 진술 내용을 요약하면 소쩍새 울음소리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소쩍새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나 이 언술의 모순적인 표층 구조와는 달리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실로 얼마나 많은 사물들의 총체적인 협조를 필요로 하는가.
빛과 공기와 물과 그리고 여러 가지 영양소들―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유기물들의 섭취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는 전 우주적 요소들의 결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생명체(국화)의 원숙한 성취(꽃)는 긴 세월(봄, 여름) 동안의 많은 고뇌(소쩍새 울음)와 시련(천둥)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심오한 자연의 이치가 짧은 몇 마디의 역설적 진술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이 시의 묘미다. 만일 이를 산문으로 설명코자 한다면 수 천 개의 단어를 동원해도 만족스럽게 표현키 어려울 지 모른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부분
     
 
 기름이 타서 재가 된다. 그런데 그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화자의 치열한 심리를 절실하게 표현하는 기능을 지닌다.
즉 끝없이 불타는 가슴을 처절히 극대화하고 있다.
기름이 재가 되고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타는 반복적 소진(燒盡)을 통해 생명의 완전 연소(燃燒)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애타는 가슴의 그 절박함을 이보다 어떻게 더 절실히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역설의 기능이다.

 고도(高度)의 은유(隱喩)도 역설의 기능을 지닌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부분

 주지(겨울)와 매체(강철로 된 무지개)가 주술(主述) 관계 곧 등가(等價)의 구조로 이루어진 은유다.
그런데 주지와 매체의 공유소(동일성)는 추출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주지와 매체가 동일성이나 어떤 유사성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적(폭력적)으로 결합시킨 고도의 비유다.
매체인 '강철로 된 무지개' 역시 '강철의 무지개'와 같은 의미 구조를 지닌 것이니까
수식어와 피수식어어의 관계로 맺어진 결속의 은유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구는 이중으로 된 복합 은유 구조를 지닌 셈이다.
겨울이 무지개라든지, 그 무지개가 강철로 되었다는 진술이 다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두 개의 역설을 이중으로 얽어 짠 문장이다.
또한 '겨울'은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당대의 괴로운 시대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시대(겨울)는 화자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강철)이긴 하지만, 생각하면 인생이란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무지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체념으로 해석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山河)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졸시 「병(甁)」 전문

 내가 쓴 선시(仙詩) 중의 하나다.
차고 다닌 호리병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 속에는 누군가 들어앉아서 술을 빚어대고 있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정황이다.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의 시급한 과제는 의식주의 문제다.
 그 가운데서도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다.
달팽이처럼 가벼운 집을 달고, 좋아하는 음식과 사랑을 데불고 유유자적 떠도는 삶을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스러운 삶인가.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것이 「병」이다. 
선시(仙詩)는 실현시킬 수 없는 지상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우리들의 꿈의 기록이라면 그리고 그 꿈이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시가 당연히 역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엄살의 시학』pp.65-68


 

로메다 님,
세계는 당초부터 모순에 차 있는 역설적 구조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주의 구조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유한하다고 할 수도 없고, 무한하다고 할 수도 없는 모순 구조입니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빛과 그늘, 삶과 죽음,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등 상반된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세상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진면목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가 역설의 어법에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언어 자체도 모순과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편리한 의사 전달의 도구이기는 합니다만
사물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지칭할 뿐 사물 자체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로메다 님,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나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과'라는 말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과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언어입니다.
로메다 님, '사과'라고 했을 때 어떤 영상이 머리 속에 떠오릅니까?
달고 새큰한 맛을 지닌, 불그스레한 둥근 과일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과들은 다 다릅니다.
붉지 않은 사과도 있고 달지 않은 사과도 있습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하나의 사과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유일한 사과가 지닌 특성을 '사과'라는 일상적 언어는 드러내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시인들은 언어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발버둥칩니다.
그것이 은유며 역설 등의 화법을 낳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시는 언어이면서 언어이기를 거부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는 곧 시에서 구사하는 언어가 일상적인 관념어가 아니라
사물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개별어(사물어)를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에서의 역설은 일상적 관념어의 껍질을 깨뜨리는 반란의 한 유형입니다.
로메다 님, 이해를 돕기 위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더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나요?
이해하기 까다로우면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습니다.
비록 역설의 원리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를 구사할 수만 있으면 되니까요.

역설은 비꼬면서 들이미는 강력한 말입니다.
마치 나선형의 나사못이 돌면서 들어가 박히는 것처럼―.
정진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