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신]
시의 화법(화자와 청자) / 임보
로메다 님, 입춘을 맞았는데도 날씨가 풀릴 줄을 모르는군요. 설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차례 준비 때문에 한가하지 않겠군요.
오늘은 시의 화법(話法)―곧 '말하는 방법'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상에서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시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를 전제로 해서 쓰여진 글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깊이 따지면 그 구조가 간단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시의 화법에 관해서는 서양 사람들이 상세하게 분석해 놓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성적이어서 사물을 잘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을 너무 이성적·논리적으로 사는 것은 인간미가 없어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기는 합니다만, 사물을 이해하거나 학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본받을 만도 합니다. 다음의 글은 서양 학자들의 이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
무릇 모든 발언은 들어줄 상대를 전제로 해서 발화(發話)된다. 독백조차도 자신이 청자로 설정된 담화라고 할 수 있다. 이스토프(A. Easthope)는 서정 양식도 서사 양식이나 극 양식과 마찬가지로 담화(discourse)의 한 형태라고 지적했다. 한편 바흐진(M.M. Bakhtin)은 모든 담화는 극이다. 시적 담화는 시인과 독자 그리고 작품 속의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삼중창이라고 말한다.
흔히 작품 속의 화자를 'persona'라고 하는데 이는 작품의 화자가 작자 자신과 다름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말은 고전극의 배우들이 쓰던 가면(mask)을 지칭하는 라틴어였는데, 연극의 등장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다시 작품의 화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에서는 서정적 자아 혹은 시적 자아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아무튼 시와 같은 서정 양식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다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희곡처럼 극적인 구조를 설정하기도 한다. 소월의「진달래꽃」의 화자는 소월 자신이 아니라 '이별을 앞둔 한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여성이 님을 향해 내쏟는 간곡한 발언이 이 작품의 내용이다. 말하자면「진달래꽃」은 소월이 한 여성의 탈(persona)을 쓰고 간접적으로 발언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차트먼(S. Chatman)은 한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구조를 다음과 같이 여섯 단계로 세분해 보이고 있다.
①실제작가→ ②내포작가 → ③화자 → ④청자 → ⑤내포독자 → ⑥실제독자 (real author) (implied author) (narrator) (narratee) (implied reader) (real reader)
①실제작가---자연인, 총체적 작가 ②내포작가---그 작품을 의도한 작가, 작품 속에 투영된 작가 ③화자---작품 속에 등장한 목소리의 주인 ④청자---작품 속에서 목소리를 수용하는 인물 ⑤내포독자---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독자(읽기를 기대하는 독자) ⑥실제독자---실제로 작품을 읽는 독자
다음의 작품을 예로 삼아 따져보도록 하자.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오날 처음 마나든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드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쏘내기 되야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서정주 「春香 遺文(춘향유문)」 전문
작자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 곧 이 작품의 주지는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는 영원한 사랑을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는― 저승까지 이어지는 구원한 것으로 노래하고자 했으리라. 그래서 이 지상에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가는 한 여인을 화자로 선택했다. 더욱이 그 여인을 고전 속의 인물 춘향으로 설정하여 극적인 효과를 노린 셈이다. 이 작품은 자연인 서정주(①실제시인) 중에서도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자 하는 서정주(②내포시인)가 춘향(③화자)으로 하여금 도련님(④청자)께 보낸 유서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작가가 은근히 읽어 주기를 기대한 대상은 어린이나 노인들이기보다는 청춘남녀(⑤내포독자)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실제로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나(⑥실제독자) 읽을 수 있다. 그러니 담화로서의 의사 소통의 회로는 이중적인 구조를 지닌 것이 된다. 즉 A(②내포작가↔⑤내포독자)와 B(③화자↔④청자)의 두 회로인데, 작자가 의도한 중요한 것은 B보다는 A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A는 숨고 B만 드러난다. B는 A의 매개 역할을 하는 수단에 불과한 셈이다.
그러나 모든 서정양식이 이처럼 복잡한 극적 구조를 지닌 것은 아니다. 야콥슨(R. Jakobson)은 '화자(addresser)---화제(message)---청자(addressee)'의 세 단계 구조로 파악한다. 그리고 ①화자 지향(1인칭 '나' 중심)의 작품은 서정성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②청자 지향(2인칭 '너' 중심)의 작품은 계몽성이 짙은 특성을 보이며, ③화제 지향(탈인칭 '그, 그것' 중심)의 작품은 정보 전달에 적합한 양식으로 사실성이 강한 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화자와 청자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시의 구조를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화자 중심 구조 특정 화자만 설정되어 있는 경우다. 김영랑의「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화자인 <나>가 등장하지만 청자는 구체적으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김종해의「항해일지④」역시 특정 청자는 없지만 화자를 <나(선원)>로 등장시키고 있는 화자 중심 구조다.
둘째, 청자 중심 구조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특정 청자만 설정되어 있는 구조다. 신동엽의「껍데기는 가라」나 김수영의「가다오 나가다오」는 '껍데기'와 '미국인 소련인'을 청자로 설정하고 있지만 화자에 대한 정보는 드러나지 않는다.
셋째, 극적 구조 특정 화자와 특정 청자가 모두 설정된 경우다. 앞에서 예로든 서정주의「춘향 유문」이나 소월의「진달래꽃」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넷째, 객관적 서술 구조 화자와 청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화제 중심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박목월의 「산도화·1」나 「불국사」와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데생을 하듯 사물을 그리는 즉물시들이 좋은 예가 된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훌륭한 소재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택된 소재를 효율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화법(話法)을 설정할 것인가가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엄살의 시학』(태학사) p.69∼72
로메다 님, 화법의 이론도 간단치가 않지요? 복잡한 이론에 대한 이해를 강요키 위해 소개한 것은 아닙니다. 부담이 되면 이론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십시오. 화법의 구조가 복잡해야만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들려주는 정담처럼 애정이 담긴 말로 그냥 쓰십시오.
즐거운 설 지내시기 바랍니다. 앞글에서 예로 거론한 몇 작품들을 참고 자료로 보여드립니다.
[참고 자료]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김영랑「모란이 피기까지는」부분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정작 나는 갑판 위에서 작살을 날리지 못했다. 날마다 작살의 날을 시퍼렇게 갈고 또 갈았지만 나는 작살을 쓸 수 없었다. ―(중략)― 한 장의 방한복으로 추위를 가린 젊은 수부의 항로는 어디로 열려있나. 상어가 출몰하는 흉흉한 바다, 그물을 물어뜯고 배를 뒤엎어 놓는 저 놈의 상어 ―김종해「항해일지4」부분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제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중략)―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껍데기는 가라」부분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김수영「가다오 나가다오」부분
흰달빛/ 紫霞門(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大雄殿(대웅전)/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泛影樓(범영루)/ 뜬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紫霞門(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불국사」전문

자연과 시의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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