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구름 위의 다락마을

[선시] 운포 가는 길

운수재 2007. 4. 11. 12:36

 

운포 가는 길 /    임보

 

자하동紫霞洞에서 운포雲浦라는 포구를 찾아
 몇 날 며칠을 걷고 있던 때다
 어느 한 강가에 이르렀더니
 아름드리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그늘 밑에 네댓 사람이 널부러져들 있다
 아마 길을 가다 잠시 쉬고 있는 나그네들인가 보다
 나도 땀을 식히려고 오동 그늘 아래 발을 들여 놓았더니
 "운포雲浦까지는 아직 둬 천리나 됩니다"
 하고 한 사내가 자리를 뜨면서 내 귀에다 일러 주고 간다
 내 마음을 읽어 미리 대답을 던지는 솜씨다
 내 눈이 휘동글해지자 또 한 사내가 자리를 뜨면서
 "고기는 많은데 먹을 게 없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가던 자가 고개를 돌려 오동나무 가지 위를 눈짓한다
 몰총새 한 마리가 강물을 내려다보며 우짖고 있다
 옳거니 저 자는 날짐승의 소리에도 귀가 열려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러자 빙긋이 웃고만 있던 흰 눈썹의 영감이
 "이분은 푸나무의 소리도 잘 듣습니다"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덥석부리 사내를 턱질한다
 허자 덥석부리가 슬며시 눈을 뜨더니
 "돌의 마음을 읽는 분도 있답니다"
 하고 눈썹 영감을 바라다보는 게 아닌가
 참 신묘한 일이로다
 어떤 자는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고
 어떤 자는 짐승들의 소리에도 밝고
 어떤 자는 초목들의 몸짓도 읽을 수 있고
 또 어떤 자는 생명이 없는 돌들의 속내까지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내가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이들을 보고 있자
 한 귀퉁이에 말없이 앉아 있던 꾀죄죄한 늙은이 하나가
 자리를 뜨면서 던지는 말이다
 "그 많은 소리들을 듣고 시끄러워 어찌들 지내나
 나는 내 소리만 들어도 귀찮은데"
 하며 귀를 여는 일보다
 귀를 닫는 일이 더 어렵다고 투덜거리며 간다.

 

'임보시집들 > 구름 위의 다락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시] 녹정  (0) 2007.04.13
[선시] 궁술  (0) 2007.04.12
[선시] 우백  (0) 2007.04.08
[선시] 답벽  (0) 2007.04.07
[선시] 운미  (0) 2007.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