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연암 박지원의 「도중사청(道中乍晴)」/ 임보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경세학, 천문학, 병학, 농학 등 다방면에 걸쳐 조예가 깊었던 실학자였다. 특히 「광문자전」「호질」「양반전」등 십여 편의 한문 단편소설을 쓴 문장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연암의 시 작품들은 그의 화려한 산문에 눌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산문 못지않게 시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문사였다. 다음의 작품 하나만 보아도 그의 시재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도중사청(道中乍晴)」은 5언시와 7언시의 두 양식을 혼용함으로 시 형식에서부터 자유분방함을 느끼게 하는 문제작이라 할 만하다. 시적 화자는 길을 가는 행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비가 온 뒤였던가 하늘은 우중충하게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시의 내용은 그 나그네가 한 시냇가에 이르면서부터 펼쳐진다.
백로 한 마리 버들 뿌리 밟고 서 있고 一鷺踏柳根
백로 한 마리 물 속에 그냥 서 있네 一鷺立水中
짙푸른 산허리 캄캄한 하늘 山腹深靑天黑色
무수한 백구가 솟구쳐 난다. 無數白鷺飛翻空
아이가 소를 타고 시내를 첨벙대자 頑童騎牛亂溪水
시내 저편 무지개는 날아오르고. 隔溪飛上美人虹
―「道中乍晴」(정민 역)
시냇가에 이르자 길손의 눈에 두 마리의 백로가 들어온다. 한 놈은 버드나무 뿌리 언저리에서 어정거리고 있고, 또 한 놈은 물속에 발을 담근 채 한가로이 서 있다. 계절은 한여름, 산허리가 온통 무성한 수목들로 푸른빛이 짙다. 한바탕 소나기라고 휩쓸고 지나간 뒤였던가.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화자인 길손만 천천히 걷고 있을 뿐 천지가 온통 조용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놀라운 정황이 벌어진다. 언덕 너머로부터 요란하게 깃 치는 소리와 함께 수백 마리의 백로 떼가 갑자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푸른 산과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른 백로 떼들의 눈부신 날개가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저렇게 많은 백로들이 언덕 너머 저쪽 어디에 있었던가 보다. 나그네는 짐짓 놀라며 무슨 까닭으로 백로들이 그렇게 날아오른 것인가 궁금해 하며 언덕길을 넘어선다. 그러자 소를 탄 한 아이가 눈에 잡힌다. 장난꾸러기 한 소년이 소를 타고 물에 들어가 첨벙대고 있다. 소 탄 아이가 물에 들어서자 백로들이 놀라 일시에 자리를 떴던 모양이다. 때마침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더니 푸른 산을 배경으로 영롱한 무지개가 솟아오른다.
이 시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제목 「道中乍晴(도중사청)」은 ‘길을 가던 중 날씨가 문득 개었다’는 뜻인데, 이는 화자의 마음이 또한 문득 환하게 트였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개인 날씨보다도 예기치 않은 정황(날아오른 수백 마리의 백로와 소를 탄 소년)에 길손의 우울했던 기분이 일시에 쇄락해졌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리라.
이 시는 길을 가는 화자의 시선을 좇아 시야에 들어오는 몇 개의 풍경을 포착하여 마치 그림을 보이듯 제시하고 있다. 시간적인 경과에 따라 약간의 공간적인 이동을 하며 전개된다.
제1,2행(버드나무 밑과 시냇물속의 두 마리 백로)-------지상
제3,4행(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비상하는 수많은 백로)----공중
제5행(시냇물을 첨벙대며 소를 타고 있는 소년)---------지상
제6행(시내 저편에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무지개)--------공중
화자의 시선은 지상에서 공중으로의 이동을 두 번 반복하고 있다. 시냇물과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백로와 소년이 펼치는 단순한 상황을 제시한다. 화자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냉정히 감추어 표현하는 것이 놀랍다. 시의 끝에 이르러 화자의 감정은 무지개라는 대상에 의탁되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감추면서 드러내는 시의 은근한 기법을 놀랍게 구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흔히 시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의미의 시, 가락의 시, 그리고 그림의 시다. 의미의 시는 화자의 생각과 감정이 직설적으로 담겨 있는 관념 위주의 작품이다. 그런데 가락의 시는 내용보다는 운율 곧 청각적인 감흥을 중요시한다. 이에 반해서 그림의 시란 시각적인 이미지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특성을 지닌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대하는 것 같은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연암의 「도중사청」은 대표적인 그림의 시라고 할만하다. 그림의 시가 여운을 지니려면 바로 이 작품에서처럼 화자의 생각과 감정이 대상 속에 숨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시의 운치며 향기며 멋이다.
약간의 의역을 곁들여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옮겨 본다.
버드나무 밑에 백로 한 마리
시냇물 가운데 또 한 마리
산은 짙푸른데 하늘엔 먹구름
문득 한 떼의 백로 날아오른다
소탄 아이가 시냇물에 첨벙첨벙!
저 너머엔 고운 무지개 솟아오르고
―「길 가던 중 문득 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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