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명시 감상

황진이의 <반달>

운수재 2007. 5. 10. 06:46

[명시감상]

 

황진이의 ‘반달’ /  임보

 

 

한국 문학사에서 한 사람의 여류 시인을 들라면 아마 많은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황진이(黃眞伊, 152?~156?)를 꼽을 것이다. 개성 출신으로 조선조 중기의 명기(名妓)라는 사실 외에 그녀의 가계나 생몰 연대에 관해서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에 관한 여러 일화들은 야사나 혹은 개인 문집 등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후대의 이야기꾼들이 재구성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진이는 당대의 한량들은 물론 오늘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를 사로잡은 매혹적인 여성이다. 시(詩)는 말할 것도 없고 가무(歌舞)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것 같다. 그녀는 문인호걸들과 더불어 적지 않은 정분을 나누면서 주옥같은 시문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명산대천을 누비며 유유자적 호방한 삶을 즐기기도 했다. 박연폭포와 서화담에 자기를 더하여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스스로 칭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기개와 자부심이 넘친 여인이었던가 짐작이 간다.

그가 남긴 시조는「내 언제 무신하여」「어저 내 일이야」「산은 옛 산이로되」「청산은 내 뜻이요」「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등 5,6수에 지나지 않지만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는 가작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벽계수라는 종가의 선비를 희롱한 작품인「청산리 벽계수야」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이라면 역시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구비구비 펴리라.

 

 

기녀들의 작품이 대개 그렇지만 황진이의 작품들도 연정을 노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작품은 긴 겨울밤을 홀로 지내면서 장차 님과 함께하게 될 사랑의 밤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이 시가 우리의 심금을 울린 것은 화자의 기발한 발상 때문이다. 동짓달 겨울밤은 얼마나 길고 긴가. 더욱이 독수공방하고 있는 처지라면 새벽을 맞기까지 얼마나 전전반측하면서 괴로워하겠는가. 화자는 그 견디기 힘든 긴 밤의 중간 허리를 잘라내겠다고 한다. 그리고 잘라낸 시간의 토막을 이불자락 사이사이에 넣어두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의 이불이 아니라 ‘춘풍(春風)’ 이불이다. 어쩌면 화조가 화려하게 수놓인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비단이불이리라. 그 이불은 님이 오시는 날 밤에 펴기 위해 지금은 장롱 깊숙이 고이 넣어 두었을 것이다. 그 이불자락 사이에 잘라낸 밤의 시간을 말아 두었다가 님이 오신 날 밤 그 춘풍 이불을 굽이굽이 펼치겠다니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님과 사랑을 속삭이는 밤은 아무리 길어도 짧게 느껴질 터이므로 이불 속에 갊아 두었던 시간을 펼쳐 연장시키고 싶다는 소망이다.

‘어른님’은 ‘사랑하는 님’이면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은 님’의 뜻을 아울러 지닌 이중 의미가 함축된 시어다. 또한 ‘춘풍’과 ‘어른’을 서로 호응의 자리에 놓아 조화를 이루게 한 것도 보통의 솜씨가 아니다. 실로 황진이의 번득이는 재치를 잘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

 

황진이는 한시에도 능통했다. 지금까지 전해온 작품은 「박연(朴淵)」「송도(松都)」「영반월(詠半月)」「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별김경원(別金慶元)」「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등 6편이다. 다 가작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명품은 역시 오언절구인「영반월(詠半月)」이다.

 

 

誰斷崑山玉 (수단곤산옥)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

裁成織女梳 (재성직녀소)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견우님 떠나신 뒤에

愁擲壁空虛 (수척벽공허)   시름하며 허공에 던져놓았네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을 노래한 작품이다. 반달을 직녀의 빗으로 본 것이 또한 기발하다. 중국의 곤륜산은 옥의 산지로 유명하다.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재단하여 빗을 만들어 직녀에게 주었는가 묻고 있다. 견우와 직녀는 일 년 내내 떨어져 살다가 음력 7월 7석 날 밤 까치가 은하수에 놓아 준 오작교 다리에서 꼭 한번 만나고 헤어진다는 전설이 있지 않던가. 반달을 그 비극적인 사랑의 여주인공 직녀의 빗으로 본 것이다. 그 직녀가 머리를 빗던 옥으로 된 빗인데 견우와 이별 후 허공에 던져 버린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제는 곱게 치장해 보일 님도 떠나고 없으니 빗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쩌면 작자 자신이 정든 님과의 이별을 겪은 후에 외로이 떠가는 반달을 보면서 이러한 시상을 떠올렸을 것도 같다. 비록 짤막한 소품이지만 시상을 붙잡아 능란하게 다루는 솜씨에서 황진이의 천부적인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근래에 인터넷 상에서 모 여가수가 불러 인기를 얻었던 「알고 싶어요」라는 작품의 원작이 황진이의 한시라는 풍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도 했다.

 

 

달 밝은 밤이면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나요? (蕭寥月夜思何事)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 (寢宵轉輾夢似樣)

붓을 들면 때로는 제 이름도 적어보나요? (問君有時錄忘言)

저를 만나 기쁘셨나요? (此世緣分果信良)

..............................................................

 

 

그러나 이 한시는 황진이의 작품이 아니라 양인자 씨의 작사를 이재운 씨가 한시로 패러디한 것임이 밝혀졌다. 황진이는 오늘 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매력적인 인물임을 새삼 실감케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적지 않은 시인과 작가들이 아직도 황진이에 매달려 계속 작품을 쓰고 있다. 그는 시간을 초월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만인의 연인’으로 오래도록 살아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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