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수필

집행유예

운수재 2007. 5. 23. 11:09

 

 

집행유예 /  임보

 

 

한밤에 눈을 떴다. 목이 마르다. 불을 켜고 물을 마시러 식탁 위에 놓인 물병으로 손이 가려던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식탁 위에는 나를 경악케 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건이라기보다는 대역사(大役事)의 현장이다. 엊저녁 내가 깎아 놓은 사과 껍질 위에 수백 마리의 작은 개미떼들이 모여 우글거리고 있질 않는가. 아니 한 자리에 우글거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다. 줄은 먹이를 향해 새로 도착하는 자와 먹이를 얻어 떠나가는 자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고속도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을 따라 승용차들이 서로 엇갈리게 왕래하듯이 움직이고 있다. 길은 식탁의 가는 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더니 방바닥의 평원을 건너 문지방에 이르러서는 다시 위로 올라 천장 가까이의 문설주 틈 사이로 스며들어갔다. 어느 깊숙한 곳에 성을 쌓아 놓고 본격적으로 진을 치고 사는 모양이다.

가끔 눈에 잘 띄지도 않은 붉은 개미가 더러 방바닥이나 식탁의 주변에서 어정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저놈이 어쩌다 사람들의 짐에 잘못 싸여 본의 아니게 여기까지 와서 미아가 되었는가 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는데, 이제 보니 놈들은 미아가 아니라 군단에 가까운 대집단이다. 저놈들이 애초에는 땅속에서 살았을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 높은 15층 아파트 내 방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단 말인가. 용감한 한 콜럼버스 개미가 신대륙(아파트)을 처음 발견하고 탐험은 시작되었으리라. 알피니스트들이 만하슬루 처녀봉을 향해 도전하듯이 아파트의 외벽을 타고 몇 놈이 기어올랐을 것이다. 아니, 어떤 놈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통로 등 새로운 탐험로를 개척하여 포상을 받기도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모세 개미를 따라 집단 이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발견한 신대륙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가. 겨울에도 늘 따스하고 맛있는 먹이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말하자면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아파트의 방들은 개미들에 의해 서서히 점령되어 갔으리라. 15층 내 방에까지 이른 걸 보면 이 아파트가 온통 개미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컵에다 물을 따라 마시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놈들이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식탁 위에 사과 껍질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탐지했으며, 어떻게 식탁의 위에 오르는 통로가 그 가는 식탁의 다리라는 사실을 터득했단 말인가. 그것도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캄캄한 한밤중에 말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 작은 개미가 보잘것없는 미물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영물로 보여 두려운 마음조차 일었다. 개미는 눈이 퇴화되어 더듬이로 상황을 판단한다는 중학교적 생물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두운 땅 속에 굴을 파고 오래 살다보니 빛으로 세상을 보던 눈은 퇴화되고 더듬이가 안테나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리라. 그런데 그 더듬이로 제 몸뚱이보다 수만 배나 넓은 주위의 상황을 환히 내다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매는 수백 미터 상공에 떠 있으면서도 지상에서 움직이는 작은 벌레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시력을 지녔다고 한다. 어떤 개들은 후각이 발달하여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물건을 탐지해 내기도 한다. 화물선에 실려 가는 쥐들은 폭풍이 일어날 것을 이미 수 시간 전에 예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미 역시 지진이 일어날 것을 수일 전에 미리 알고 지상으로 다 기어 나온다고 한다. 인간이 지상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감각의 기능면에 있어서는 다른 생명체들보다 반드시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놈들은 내가 곤히 잠든 어두운 밤에 탐조등보다 밝은 촉수를 세워 내 방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다녔으리라. 최초로 먹이를 발견한 놈은 봉화를 올려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을까. 무슨 봉화일까? 빛의 봉화는 아닐 것이고, 냄새의 봉화일까, 아니면 영의 교신일까? 내 침상의 구석구석도 그들만의 예민한 감각으로 측량을 하면서 얼마나 오르내렸으리―. 잠잘 때 내 목덜미가 스멀스멀 가려웠던 것도 다 이놈들의 소행이었으려니 생각하니 이 아니 괘씸한가.

무단 가택 침입자! 이놈들을 어떻게 처벌한다? 에프킬러 화생방 무기로 기총소사를 해 버려? 그러나 집단 살생은… 썩 마음내키지 않는다. 놈들은 상황을 짐작했는지 허둥거리기 시작한다.

“잠시 집행유예다. 내일 아침까지 도망갈 기회를 준다.”

나는 침상 주위에 에프킬러를 뿌려 발리케이트를 친 다음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쉬 잠이 오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도 어느 큰 분의 저택에 무단 침입하여 그분의 신성한 영토를 허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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