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봉틀 소리 / 임보
일제 말기 소위 대동아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은 가난이 무엇인가를 몸소 체험해 뼈저리게 알고들 있다. 매년 봄 보릿고개를 넘을 무렵쯤이면 먹을 것이 다 떨어져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지냈다. 물오를 때의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끓여 먹기도 하고, 칡이나 띠 뿌리를 캐어 씹어먹기도 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굶주려 누렇게 부어 있었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날 때마다 큰길가에는 새로운 아사체(餓死體)가 드물지 않게 발견되곤 했다. 나는 그때의 내 유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미친개는 혀를 드리우고
검은 들판을 종일 헤매고
문둥이는 담이 무너진 마을을 돌며
빈 깡통만 두드리는
눈 아픈 3월
손이 튼 아이들은
일찍 풀린 양지밭에 주저앉아
대꼬챙이로 띠뿌리를 뽑아 씹고
볼이 부은 에미는
물오른 소나무 껍질을 벗기며
가마솥에 맹물만 가득 끓이고 있네.
―졸시 「보릿고개」 전문
내가 태어난 곳은 순천(順天) 인제리다. 서너 살 되던 무렵 대동아전쟁이 한창 불붙고 있었던 때 조부께서는 공습의 위험을 피해 식솔을 끌고 곡성군(谷城郡) 석곡면(石谷面) 구봉리(九峰里) 산골로 이사를 했다.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깊은 산골일 것인가 짐작이 가리라(지금은 4차선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당시 우리 식구는 80이 넘은 증조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어머니와 나 다섯이었다. 신학문을 하겠다고 동경에 건너가신 아버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몇 해째 소식이 없었다. 우리가 자리잡은 구봉리 등구정(登龜亭)은 한 30여호 되는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대개가 몇 마지기의 산비탈 논밭을 일구어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농사꾼들이었다. 우리 집은 동, 남, 북 삼면이 대밭으로 둘려있는 세 간짜리 허름한 초가였다. 하루 종일 대숲 그늘 속에 잠겨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겨울에는 무척 추웠다. 여름이면 마당은 말할 것도 없고 헛간의 지붕을 뚫고 죽순들이 창날처럼 솟아오른 통에 조부께서는 아침마다 그놈들을 파내시느라 곤욕을 치르셨다.
그 빈한한 산골에 조부께서는 겨우 몇 되지기의 논밭을 장만해서 이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농토도 우리 식구에게는 경작하기가 버거웠다. 조부님은 원래 한학을 하신 분이셔서 노동일과는 담을 쌓고 지내셨고, 연약한 조모님과 어머니 역시 농사에는 손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막막한 상황에서 집안을 슬기롭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꾸려간 이가 어머니였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어머니는 순천에서 이사올 때 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싱거미싱 손재봉틀이었다. 당시만 해도 근처의 인근 마을에 재봉틀을 소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손재봉틀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두루마기에서부터 저고리 잠뱅이 조끼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옷을 만들어 냈다. 바늘에 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박고 공그리고 하여 어렵사리 옷을 짓던 시골 아낙네들에게는 이 기계바느질이야말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느질이 촘촘하고 똑바를 뿐만 아니라 튼튼하고 아름다우니 다투어 일감을 가져왔다. 어머니는 바느질 대가로 쌀이며 보리 등의 곡식을 받기도 하고 농사철에는 곡식 대신 일품으로 받기도 했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나서 일감이 끊이질 않았다. 더욱이 명절 무렵이면 온 방안이 가지각색의 옷감들로 가득했다. 나는 한밤중 어머니의 재봉틀 돌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희미한 호롱불빛에 어머니의 검은 그림자가 벽에 어른거리고 가끔 재봉틀 소리가 멈출 때면 바람에 대숲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문틈으로 기어들었다. 내가 몸을 뒤채는 바람에 흘러내린 이불자락을 어머니는 끌어다 덮어 주시고 다시 재봉틀을 돌리시곤 했다. 어떤 때는 재봉틀 소리와 함께 닭이 홰를 치며 우는 소리를 이불 속에서 듣기도 했다.
한편 어머니께서는 길삼일도 잘 하셨다. 봄에는 누에를 길러 명주실을 뽑고 여름에는 삼을 베어 베를 짜고 가을에는 목화를 거두어 무명베를 만들기도 했다. 어머니가 만든 열두 새 가는 베는 장터에 내놓기가 무섭게 무값으로 팔려 나갔다. 지금도 우리 고장의 삼베는 ‘돌실베(石谷布)’로 세상에 이름이 나 있다.
이와 같은 어머니의 피맺힌 땀으로 우리 집안은 서서히 일어섰다. 해마다 논밭을 사서 보태고 머슴을 부려 농사일을 해냈다. 아담한 사랑채를 지어 조부님께서 편히 기거하시도록 했고, 조부모님 환갑에는 인근의 어른들을 모셔와 큰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어머니의 한평생은 가족들을 위한 헌신 바로 그것이었다. 증조모님은 물론이고 조부모님들의 장례도 홀로 치르셨다. 와병에 계신 조모님을 7년 동안이나 돌보셨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겠는가마는 평생 한마디의 불평도 나는 들은 바 없다. 세상은 그에게 여러 차례 효부상을 수여했지만 그 상을 받으러 몸소 시상식장에 가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를 다시 뵈온 것은 20여 년이 지난 뒤 어머니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을 함께 지냈을 뿐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셨다. 거기에도 버릴 수 없는 권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가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붙잡지 않았다. 젊은 시절도 홀로 지냈거늘 그분의 뜻대로 놓아드리자고 했다.
열일곱 어린 신부
꽃정도 트기 전에
신학문에 빠진 낭군
만리 타국 떠나가고
생과부 팔십 평생을
무얼 믿고 사셨을까
열두 새 무명 삼베
삼고 잣고 날고 짜고
겉보리 도구방아
달빛으로 밤새우다
동트자 꼭두새벽에
머슴 몰고 나가시데
5척 작은 몸에
서린 힘도 놀란지고
크신 귀 긴 이마에
지혜 슬기 넘쳤을까
가승(家乘) 앞 효열행장(孝烈行狀)에
천만 사연 눈물겹네
인동초 아픈 풀이
당신보다 더했을까
잃은 땅 모진 세월
산천까지 굶주릴 때
시부모 어린 새끼를
손발 깎아 먹였고녀.
―졸시 「인동초(忍冬草)」 전문
그분의 생애는 인동초 바로 그것이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한 여성의 위대한 사랑과 헌신의 힘을 보여 준 것이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뜨신 지 어느덧 10년이 가까워 온다. 나는 지금도 밤중에 깨어나면 재봉틀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가 돌리시던 돌돌거리는 손재봉틀 소리― 그 소리는 특히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땐 천만 원군(援軍)의 말발굽소리로 다가와 내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