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산문

물 있는 풍경 / 유공희

운수재 2007. 6. 7. 07:03

 

 

 

물 있는 풍경   /   유공희

 

나는 물 있는 풍경을 좋아한다.

오색의 저녁놀이 흘러내리는 강변,

황금색 햇살에 아침 안개가 밀려가는 호반,

별빛이 깨어져 흩어지는 여름밤의 샘가,

가슴에 부푸는 온갖 시정(詩情) 속에 온종일을 서성거리게 하는 바다의 풍경 들에서

나의 영혼은 언제나 신비한 고혹(蠱惑)을 느끼는 것이다.

물은 이 지상의 모든 풍경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신비하고 또 더없이 보편적인 물질이다.

물은 그 투명성과 무한량의 가능성으로써 인간의 시각(視覺)이 탐하는 온갖 풍경에 마술적인 뉘앙스의 변화를 현출(現出)시킨다.

빛나는 것은 물 있는 풍경 속에서 그 오색의 미를 발휘하고, 어둠은 또한 여기서 그 은밀한 온갖 신비를 펼쳐 놓는다.

물가의 신비한 빛을 찾아서 온갖 새들은 날아오고, 물 있는 풍경 속에서 모든 생물은 제 각기 과잉하는 표정의 낭비를 즐기며 번식한다.

물은 지구를 감도는 ‘빛’의 연인(戀人)… 모든 생물의 욕정의 악상(樂想)… 사랑하는 사람들도 고요히 물가를 찾아오고, 영원과 무한을 동경하는 시인과 철학자도 물가를 바장이며 상(想)을 다듬는다.

우리는 물 있는 풍경과 인간정신의 온갖 내용과의 신비스러운 무량(無量)의 화합을 안다.

서양 자연철학의 시조 탈레스는 만유의 근원을 물이라 했거니와 물 있는 풍경에서 모든 인류의 문화는 발상(發祥)하였다.

물가에 굴러져 있는 조약돌,

한들거리는 꽃송이들,

날아드는 온갖 날개를 가진 생물들,

물 위에 내려앉는 하얀 안개,

알 수 없는 무수한 발자국,

하룻밤 사이에 피어나는 이름도 없는 버섯들,

돌을 치고 모래를 씻어내는 끊임없는 물결의 속삭임,

그곳을 싸고도는 인간의 온갖 정서와 향수의 노래 소리,

달콤한 권태에 한숨짓는 정념(情念)의 보헤미아니즘…

물 있는 풍경은 또한 내 청춘의 시정(詩情)의 고향이었다.

 

                                           x                                            x

 

내가 학업을 마치기 전의 1년 동안 하숙하고 있었던 동경 교외 지유우가오끼 근방의 풍경은 언제나 그립게 추억되는 인상 깊은 곳이다.

그것은 내가 기숙(寄宿)한 하숙 근처에 ‘구품불(九品佛)’란 절이 있고 그 곁에 조용한 묘지를 끼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조그만 호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가만 있으면 혼자 이 호수를 찾아와서 보트를 빌려 타고 한낮이면 황금색의 햇빛과 흰 구름과 투명한 물결이 만들어내는 온갖 풍경의 변화에 취했고,

황혼이면 호면(湖面)에 꽃피는 오색 저녁놀의 아름다움에 나를 잃고,

또는 선들바람에 밀려오는 잔물결들이 뱃전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은밀한 시정(詩情)에 홀로 몸부림치곤 하였다.

더욱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쭉 늘어서 있는 해바라기의 도영(倒影)은 한층 인상 깊은 것이었다.

이 무렵에 나는 P.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사(蛇)의 소묘(素描)」「나르시스 단장(斷章)」등의 「Charmes」의 시편 그리고 「지중해의 감흥」과 「Variete」의 모든 산문에 문자 그대로 고혹(蠱惑)되어 시와 사상의 신화적인 상화(想華) 속에 도취하고 있었다.

‘1일 200페이지 독파’하는 벅찬 과업을 측은하게도 수행하고 있던 동지 G군을 끌고 와서

귀한 맥주를 기울여 가면서 나 일류(一流)의 문학관 인생관을 토로하여 그로 하여금 ‘200페이지’의 무계(無稽)함을 깨닫게 한 것도 바로 그 묘지 곁의 호반에서였다.

 ‘독서는 무엇인가 항상 약간의 인내력을 강요하는 것이며 나는 이 자리에 곧 창조되어야 할 내 것을 요구한다’는 발레리의 의견이 바로 그 무렵의 나의 생활감정이었기 때문에

보트 위에서나 호수가의 풀밭에서나 누워서 읽으려고 포켓 속에 넣고 온 문고본은 언제나 포겟 속에 들어있는 채였고,

나는 화구(畵具)를 팽개쳐 둔 베르테르는 아니라도 가슴속에 부풀어 오르는 형상을 벼르는 시정(詩情)에 오열(嗚咽)하면서 호반을 배회할 뿐이었다.

때로는 까닭도 없는 슬픔에 때로는 무엇인가 무한(無限)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동경에 잠긴 채

발밑으로부터 아득한 저편 언덕까지 말할 수 없는 정밀과 해조(諧調) 속에 한시도 멈추지 않는 신비한 물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하나씩 둘씩 별이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까지 못가를 배회하는 것이었다.

 

                                           x                                           x

 

보들레르는 그의 『악의 꽃』이나 『파리의 우울』의 도처에서 바다와 항구를 노래하고 “불과 수 리 범위의 움직이는 물이 인간의 영혼을 ‘무한’의 정서 속에 사로잡는다”고 탄식했지만

보들레르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시인 가운데 물 있는 풍경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지 않는 시인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보다도 자유를 희구하고 무한을 동경하고 미를 사랑하는 것이 시인의 영혼이라면 물 있는 풍경―

호수나 강이나 바다는 이 같은 시인의 영혼에 다른 어떠한 풍경보다도 절실하게 공명을 주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멀리 호머의 바다의 묘사는 그만두고라도 영원한 자유의 장엄한 심벌로서 바다를 읊은 바이런,

혼자 호반의 돌 위에 앉아 옛날의 애인과의 온갖 로맨스를 추억하면서 ‘시간’이 모든 것을 지워 없애 버리는 인생의 무상을 끝없이 밀려오는 호수의 물결의 애달픈 멜로디에 맞추어 노래한 「La martine」,

 호반 시인 워드워즈의 모든 명상적인 시편들….

그 밖에 동서 각 나라의 유서 있는 강과 호수와 바다에 얽힌 시인들의 절창(絶唱)은 일일이 매거(枚擧)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 같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희곡 가운데에도 고전적인 모든 작품 중에는 물 있는 풍경에서의 인간들의 아름다운 생활의 단면이 인상적으로 묘사된 장면을 허다히 볼 수 있다.

『베르테르』나 『헤르만과 도로테아』의 샘가의 장면,

H. 헤세나 T, 스톰의 작품 속에 나타난 호수를 둘러싼 향수의 추억의 정조 같은 것은 문학을 즐기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겹게 기억할 것이다.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들이 오아시스를 만나서 굶주리던 생활감정을 회복하고 즐긴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샘[泉]은 사실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은근한 정서를 간직한 풍경인 것이다.

동서 각국의 건국신화에 샘[泉}이나 못[池]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그러려니와,

특히 희랍신화 가운데 숲속의 샘가에서 비로소 자기의 미모(美貌)를 발견하고 님프들의 속삭임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자신의 영상에 도취한 끝에 한 송이의 수선화가 되어 버렸다는 나르시스의 신화 같은 것은 누구나 아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2

0세의 A. 지드와 P. 발레리가 거의 동시에 이 나르시스의 신화에서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자아(自我)’의 심연 속에 잠겨갔던 일을 생각하면 이 한 토막의 샘가의 애달픈 신화는 언제나 아름다운 문학이나 미술의 소재가 될 것도 같다.

 

                                                x                                         x

 

요즈음 수도(水道)가 발달해서 거의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말에 ‘이도바다 가이기’(우물가 회의(會議))하는 게 있다.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온 아낙네들이 모여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것을 빈정댄 말이다.

설령 재잘거리는 화제가 향기롭지 못할망정 수양버들이 늘어진 동리 밖 우물가에 젊은 여인들이 물을 길으면서 담소하는 광경은 내게는 때로는 신화의 한 장면을 목도하는 듯한 환상을 느끼게 하는 정경이기도 하다.

하나의 한가로운 시간이 행복과도 같이 그 정경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달콤한 권태 속에서 소복한 여인들이 여신들처럼 담소하고 있는 이 정경이 내 눈에는 태초의 창조신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아득한 우리 조상 때부터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나의 은밀한 시정(詩情) 속에서는 ‘샘’이란 말은 ‘고향’이란 말과 무시(無時)로 교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지적 영위(營爲)의 여명(黎明)의 이미지를 꽃피게 해주는 말인 것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면 그것은 샘가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나는 몰래 헤아려 보기도 한다.

우물가의 정경에서 또렷이 느낄 수 있는 행복 같은 하나의 여가야말로 그 달콤한 권태야말로 사상과 시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x                                                 x

 

물 있는 풍경에 대한 나의 ‘Charme’은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정신의 영원한 감촉이며 또한 문명 창조의 유일한 동기인 애달픈 ‘ennui'의 본연이 저 신비스러운 물질을 둘러싼 풍경 속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무한에의 감촉… 그것은 구(救)할 길 없는 권태의 각성이며 물 있는 풍경에서 나의 영혼은 이 태초의 달콤한 비애 속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들이나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현란(絢爛)한 하나의 무위(無爲)― 형상의 잉태(孕胎)에 몸부림치는 신화적인 하나의 정신의 여백 속에….

바다 앞에 선 사람, 강변이나 호반을 배회하는 사람, 샘가에서 담소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창조의 신들의 포즈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1957. 12. 25.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