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衣裳)의 신화(神話) / 유공희
작년 추석날은 새벽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잠자리에서 색동저고리며 다홍치마를 어루만지다가 희한(稀罕)하게 고운 꿈이라도 꾸었을 어린이들의 슬픔은 말할 수도 없었다.
모처럼의 호사를 애처롭게 연기당했거나 조르고 졸라서 인형같이 차리고 나섰다가 비에 젖어 돌아와서는 눈물을 흘리고 울기나 했었다.
하필이면 추석날 아침에 비가 왔으랴. 의상의 즐거움을 모르는 슬픈 나체의 천사들의 질투이기라도 했던가?
알랑은 ‘옷을 입은 인간이란 얼마나 기묘한 동물인가!’라고 말했지만 이 지상에서 겪어야 할 고뇌(苦惱)만치는 허다(許多)할 인간의 유열(愉悅) 가운데에서도 의상의 즐거움은 그 공리성과 인간의 장식 본능을 제외하고도 오묘(奧妙)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의 깊은 유열은 결코 공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만이 누릴 줄 아는 의상의 풍속은 진실로 그럴 듯한 풍속이라는 것을 나는 이따금 되새기게 된다. 기독교 신화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과실을 따먹은 까닭에 낙원에서 추방되고 벌거숭이로서 서로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하니 나체는 본래 낙원의 풍속이요,
우리가 의상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추방의 덕택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따금 나체에의 향수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 지상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체는 금단인 것만은 사실이다.
의상의 풍속은 지상의 슬픈 숙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신이 모르시는 유열을 발견할 줄 아는 동물이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무한히 펼쳐져 있는 공간에 대하여 언제나 무엇인가 불안을 느끼고 있고 이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이 곧 예술인 것이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의상의 즐거움은 그것이 예술에 통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진실로 오묘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번식하는 자연력의 맹목적인 협위(脅威)로부터 ‘형상(形象)’으로써 해탈하는 인간의 독특한 생의 방법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자아의 형상화를 희구하는 것이며 자기의 생명을 하나의 조화로서 지양(止揚)시키는 데서 생의 유열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가 아닌 일반 생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이 같은 유열의 가장 비근한 것이 곧 의상의 즐거움이다.
명절날 아침에 때때옷을 입은 어린이들의 춤(무용)에 가까운 보행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날개는 아니라도 새옷을 갈아입게 되면 우리는 누구나 이 애매한 육체의 무게로부터 아득하게 해탈된 감회를 가지고 발을 옮겨 놓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옷을 입은 인간이 기묘한 동물인 게 아니라 잠자리의 날개가 아름다운 자연인 것 이상으로 의상은 이 지상에서의 인간이 누리는 희한한 구원이요 즐거움인 것이다.
아침 햇빛이 부채살처럼 피어오를 무렵 거울 앞에서 조용히 단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여인의 자태는 내게는 무슨 신화를 목도하는 듯한 환각을 느끼게 해 주는 정경이다.
아직 조화를 얻지 못한 형자(形姿)가 하나 커다란 거울의 원형 속에서 몸부림하고 있다.
부채살같이 황금의 햇빛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온갖 밤의 그림자들이 이 지상의 모든 벽 아래에서 사라져 가는데 여인의 하얀 손가락들이 몸부림하는 형자의 탄생을 재촉한다.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지혜가 벌거숭이가 되려고 펄덕거리는데 여인은 곱게 단장한 몸에 옷을 갈아입고 그 선천(先天)의 온갖 무구(無垢)를 간직하던 신비스러운 거울의 원형 그 속에서 태어나 조용히 공간을 고치면서 일어서는 것이다.
오묘한 생의 유열을 암시하는 가지가지의 선의 아름다움이 여인의 발에서부터 굽이쳐 오른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난 나체의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보다 내게는 아침마다 거울의 원형 속에서 탄생하는 우리의 의상의 여인이 얼마나 더 친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요즈음 이른바 스트립쇼라는 것이 유행하는 모양이나 아직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나에게도 그것이 얼마나 추잡한 것이랴 하는 것쯤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체로서는 서로 부끄러워서 등덜미가 오싹거리게 되어버린 이 지상에서는 파렴치한 점에서 최대의 쇼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문명국의 신사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정숙(靜肅)하게 관람하시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도대체 나체로써 춤이 추워지는 뱃장과 에너지에 놀랄 뿐이다. 그것은 실낙원에 대한 한 가지 반항일까?
예술은 맹목적인 자연력의 협위(脅威)로부터 형상으로써 해탈하는 인간의 거룩한 작업이고, 의상은 인간이 그 애매한 육체로부터 해탈을 기도하는 징표이다.
춤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의상의 도움을 빌어서 알뜰하게도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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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의 의상이고 독특한 아름다움이 없으랴마는 우리나라의 여성의 의상은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오이씨 같은 버선발로…’라는 노래의 구절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치렁치렁 늘어진 치마폭 아래 보일락 말락 보얀 버선발이나 늘어진 치마 주름의 풍만한 움직임이나 나불거리는 옷고름 저고리 소매의 너그러운 곡선(曲線), 보기 좋게 여민 저고리의 깃이며가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따금 느끼는 일이지만 발에 신은 물건으로 우리나라 여성의 버선같이 아름다운 것은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네 개의 곡선을 가지고 발의 모양을 그렇게 아름답게 추상해 낸 디자인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우리 고전 가운데 무명 부인이 쓴 「조침문(弔針文)」이란 재미나는 수필을 읽지 않더라도 옛날의 우리 여성들은 입는 즐거움뿐 아니라 만들어내는 기쁨까지도 알뜰하게 누렸으리라.
그런데 오늘날 도시의 모던 여성들은 다만 유행을 방패로 기를 쓰는 상인들의 값싼 고객이 되어 버렸으니 그들이 뽐내는 교양이 의상의 즐거움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오묘한 의미를 이해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구태여 유행이란 것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차림(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차림이라는 게 ‘아․라․모오드’가 되었다는 뜻인데)을 하고 만족하고 거리를 나다니게 된다는 심리는 모방심리의 만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 스타일을 창조해 낸다면 치마의 길이를 무릎 위까지 치켜 올린다든가 저고리의 길이를 엉덩이까지 끌어내린다든가 아무튼 의상의 어느 부분을 드러나게 눈에 띄게 해야 하겠는데 이렇게 되면 칸트의 이른바 ‘Narr in der Mode(유행 속의 바보)’가 되어 버리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갓을 쓰고 모터사이클을 타고도 태연하다는 따위의 무감각은 칸트 같은 사람도 ‘Narr ausser der Mode(유행 밖의 바보)’라고 말하고 그보다는 ‘Narr in der Mode'가 낫다고 했다.
일본의 어느 윤리학자는 ‘유행은 큰 거리를 활보하고 인습은 뒷골목을 슬금슬금 기어다닌다’고 재미있는 말을 했지만 군자(君子)가 아니라도 대로(大路)를 떳떳하게 다녀야 할 바에는 유행에 무감각할 수는 없는 것인데 유행을 따라도 항상 속을 차리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속을 차리자는 것은 어떻든 칸트의 이른바 ‘바보’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지상에서의 인간의 숙명을 깊이 깊이 자각하자는 말이다.
칸트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목적을 위하여 가치 있는 목적을 희생시켜 버리는 인간’을 ‘바보’라 했다. ‘바보’는 말하자면 가치를 전도시키고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가치 전도는 우리의 의상의 풍속에 드러나게 많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여학생이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스커트의 주름이 상할까 봐 펄쩍 스커트 자락을 까올리고 하얀 즈로즈를 슬쩍 보여주고도 태연하다는 것도 그러려니와, 역시 양복바지의 주름이 아까워서 평좌(平坐)를 못 하고 남달리 하지(下肢)의 고역을 감수하는 신사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스커트에게 입혀버린 여학생, 양복이 입어버린 신사라는 괴상한 자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어느 단편이든가 신부가 된 친구를 방문한 어느 신사가 안부를 묻자 ‘이곳에서는 양복바지의 주름에 쓸데없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 제일 좋다’고 신부가 된 친구가 법의(法衣) 자락을 펼쳐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친구의 심정은 하늘에 계시는 천주보다도 그야말로 객(客)이 되어 버렸던 자기의 주(主)를 다시 찾은 만족감이 컸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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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거닐어 보면 한때 ‘걸어가는 부동산’이란 기묘한 대명사로 불리우던 무리가 활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십만 원의 의상과 귀금속으로 몸을 싸고 다니는 이들은 가난한 이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면 염치없이도 감각이 마비된 시체로밖에는 보이지 않은 것인데,
이들은 사실은 의상을 즐긴 게 아니라 자나 깨나 그것에 번뇌하는 의상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니 칸트의 ‘바보’ 중에서도 상 바보라 측은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이들 앞에 예배(禮拜)하려는 풍속조차 성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처량한 세상이랴!
이들을 위해서는 때로는 의상에 반역하여 나체의 평등을 부르짖고 싶어지는 때가 없지도 않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공중목욕탕 같은 데서 ‘아담이 갈고 이브가 베를 짜고 했을 때 귀족이 어디 있었더냐!’라는 존 보올의 경구라도 음미해 가면서 서글픈 나체의 평등을 향락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체의 평등을 즐긴다는 것은 생각해 보자면 이를테면 죽음의 평등을 즐긴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눈물겨운 인간희극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나 자기의 처량한 밑천까지 털어낸다는 것은 청승맞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체의 평등! 이보다 더 궁색스러운 인간의 사상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목욕탕의 ‘평등나체’와는 다르지만 요즈음에는 나체를 또 하나의 사치로 즐기자는 풍속이 이른바 문명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 같다.
구미(歐美)에 유행하는 ‘나체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주의’이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지난여름에 서울에 사는 우리의 남녀 문화인들이 성대하게 거행한 ‘문화인(文化人) 사육제(謝肉祭)’의 소식을 들어도 그렇다.
그들이 무슨 문명의 누더기라도 벗어버린다는 시원스러운 기분으로 보잘 것 없는 희푸른 육체를 하루 동안 한강 백사장에다 널어놓고 무슨 보람을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화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나체는 하나의 사치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나형(裸形)에의 향수! 그것은 말하자면 현대문명과 인간정신의 괴리에서 싹튼 애달픈 정서이리라.
파리를 버리고 타이티 섬으로 도망해 버린 폴 고갱이나 알제리어에서의 지드의 흥분을 어찌 이해하지 못 하랴.
그러나 인간은 황홀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의상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희한한 숙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뉘우칠 필요가 있다. 거울 앞에서 살고 거울 앞에서 잠자라고 한 보들레르의 댄디이즘은 아니라도 신비스러운 의상의 조화로써 우리는 애매한 육체의 무게로부터 맹목적인 자연의 협위로부터 해탈하는 유열 속에서 생의 오의(奧義)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의상의 즐거움! 그것은 이를테면 실낙원의 모욕으로부터의 역설적인 해탈의 표징(表徵)이 아닌가! 예술이란 원죄의 사상에 대한 찬란한 인간의 역설적 승리를 이름이 아니던가!
우리는 누구나 다 아름다운 조화 속에 자기의 생명을 형상화함으로써 무진(無盡)한 지상의 의미를 꽃피우는 기쁨을 다 같이 나누어야겠다.
하버드 리드의 말처럼 예술가가 독특한 인간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독특한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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