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시

시인의 죄 / 유공희

운수재 2007. 6. 27. 07:13

 

시인의 죄 /   유공희

 

푸른 시냇가 흰 돌 위에 피로한 시인……

너의 무위(無爲)와 침묵이

네가 좋아 따라온 소녀의 가슴에

비애를 알으켜 주어서는 안 된다

 

나라 없는 하늘에도

노란 구름은 장미같이 피는데

임자 없는 시냇물도 혼자 춤추며 흐르는데

아, 우리의 소녀의 푸른 눈동자는

빛나는 이 땅의 얘기를 최촉(催促)하는데……

 

푸른 시냇가 흰 돌 위에 말없는 사나이

뜻 없는 오월 햇볕 속에 목이 메어

까마귀같이 배고픈 시인이여!

 

말없이 돌 밑에 핀 붉은 꽃을 가르침은

소녀의 맑은 눈을 위함이냐!

오히려 네 눈이 갈망하는 향료냐!

 

아, 구름같이 살찌는 심정

푸른 하늘처럼 굶주린 마음……

일찍이 말 못하는 너의 죄를 위하여

어떠한 벌이 있었느냐!

 

너의 청춘은 이 날

차라리 이름 없는 허공이 되어

소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 살고 싶으리라.

(194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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