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죄 / 유공희
푸른 시냇가 흰 돌 위에 피로한 시인……
너의 무위(無爲)와 침묵이
네가 좋아 따라온 소녀의 가슴에
비애를 알으켜 주어서는 안 된다
나라 없는 하늘에도
노란 구름은 장미같이 피는데
임자 없는 시냇물도 혼자 춤추며 흐르는데
아, 우리의 소녀의 푸른 눈동자는
빛나는 이 땅의 얘기를 최촉(催促)하는데……
푸른 시냇가 흰 돌 위에 말없는 사나이
뜻 없는 오월 햇볕 속에 목이 메어
까마귀같이 배고픈 시인이여!
말없이 돌 밑에 핀 붉은 꽃을 가르침은
소녀의 맑은 눈을 위함이냐!
오히려 네 눈이 갈망하는 향료냐!
아, 구름같이 살찌는 심정
푸른 하늘처럼 굶주린 마음……
일찍이 말 못하는 너의 죄를 위하여
어떠한 벌이 있었느냐!
너의 청춘은 이 날
차라리 이름 없는 허공이 되어
소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 살고 싶으리라.
(194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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