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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별 / 유공희

운수재 2007. 7. 23. 07:25

 

멋있는 별  /   유공희

 

소란한 도심(都心)의 밤거리를 걸어가다가 고층 빌딩들 사이로 문득 동그란 보름달을 본다.

오염된 대기 속에 누르께한 병색이지만,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다정한 얼굴을 만난 듯한 감회를 느낀다.

마음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걸을 수가 없게 된 대도시의 밤거리에서 그러한 감회를 진진하게 누리자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 상황 속이기에 이 만남은 한층 더 반가운 것이다.

거나하게 취한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쳐들며 “오, 자네 거기 건재(健在)하는군!”하고 탈속적(脫俗的) 독백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달도 미소를 지으며 내게 눈짓을 보내는 것 같다.

그런데, 도시의 밤거리에서 문득 만난 저 달은 바로 안데르센의 『그림 없는 그림책』 속의 그 견문(見聞) 넓은 달이 아니냐!

시끄러운 밤거리를 걸어가다가 자기를 쳐다보고 한잔 한 기분에 손까지 흔들어 보인 나를, 저 달은 필시 그 가난한 화가에게 들려 줄 한 토막의 웃음거리로 치고 저렇게 싱글벙글 내려다보고 있으렸다 생각하니 왠지 술이 좀 깨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달을 보고 한마디 따끔한 응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보게! 자네가 그 화가를 놀라게 해 줄 수 있는 희한한 이야깃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자네 그 고운 얼굴에 발자국을 남겨 놓고 간 인간들 기억일 걸세!”

그러자 달은 좀 언짢은 듯한 얼굴이 된다.

달에 사람의 발자국이라! 참 별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문득 든다.

미국인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던 때의 TV 화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본 사람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를 맛보았을 것이다.

끝없는 암흑의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하는 그 괴기(怪奇)한 달 표면을 헤엄치듯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인간을 지켜보다 말고 나는 몇 번이나 마당에 나가서 중천에 두둥실 떠 있는 달을 쳐다보았다.

저 말끔한 달의 어느 한 지점(地點)에서 지금 TV 화면에 보이는 저런 해괴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그저 기가 차기만 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믿을 수 없는 추문(醜聞)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환멸(幻滅)을 저만치 밀어버리는, 더 희한한 하나의 감동이 내 가슴속에 되살아난다. 그것은 달에서 본 지구의 모습이다.

내 속에서, 달에 대한 환멸은 지구에 대한 미증유(未曾有)의 애착으로 착실하게 오버랩한다.

광막한 우주 공간 속 저어기 손에 잡힐 듯이 둥실 떠 있는 신비로운 구체(球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별!

직접 체험한 암스트롱의 감회에야 어찌 미치리오 마는 나는 그 기막힌 사진을 볼 적마다 ‘우리는 참 멋있는 별에서 살고 있구나!’하는 감동을 금할 수가 없다.

지구에서 본 달의 예쁨보다도 달에서 본 지구의 아름다움은 그 괴기한 달 표면의 미움 때문에 한층 더 돋보이는 것이었다.

군데군데 신비로운 베일로 가리어진 채 둥실 떠 있는 저 지구라고 하는 푸른 별! 저 푸른 빛 속에는 흙 속에서 꽃이 피어나고, 바위에 파란 이끼가 앉고, 모래 언덕에서는 노오란 버섯이 피어나는 이치가 들어 있을 것이다. 저 지구의 푸른 빛 속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오가는 그 이치가 들어 있을 것이다.

 저 지구의 푸른 빛 속에는 꽃에 나비가 앉는 그 이치와 ‘부르는 나에 따르는 너’의 이치가 살아 있을 것이다.

저 지구의 푸른 빛 속에는 슬기로운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지어내고 시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는 그 이치가 살아 있을 것이다.

저 지구의 푸른 빛 속에는 싸움을 싫어하고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의 그 숨결이 살아 있을 것이다.

언제나 참된 것과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살아남는 이치가 저 지구의 푸른 빛 속에는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암스트롱도 처음 보는 눈앞의 달의 표정보다도 저 푸른 지구라는 별의 모습에 더 넋을 잃었을 것이다.

 인류가 달세계에 가서 살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풍류장자(風流長子)라도 달에다 별장을 지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떠한 엽기가(獵奇家)도 달의 표면에서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지구가 그리워서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달에 귀양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지상에서 달을 소재로 지어낸 시나 이야기의 몇 갑절의 눈물겨운 지구의 시와 이야기를 남겨 놓고 죽을 것이다.

술 취한 어느 풍류객이 의기양양 달세계의 밤거리를 걷다가 문득 중천에 둥실 떠 있는 푸른 지구를 쳐다보게 되면 “오, 자네 거기 건재하는군!”이 아니라, “아, 언제나 다시 당신의 품안에…”하고 통곡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달아,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가 아니라, “지구여, 지구여, 푸른 지구여, 부모형제 살고 있는 멋있는 별이여!”하는 소리가 모든 달나라 노래의 후렴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지구에서 보는 달빛이 향수(鄕愁)에 병든 회색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우울한 표정을 하고 서성거리는 저 사치스러운 염세가들을 위해서는, 어떤 치료법보다도 모두 로켓에 실어 보내어 한 달쯤 달에서 지내게 하는 새 전지요업(轉地療法)이 가장 효험이 있지 않을까?

서울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달을 쳐다보고 나는 어느덧 그곳에 향수에 지친 동족이 살고 있을 날을 생각하고 있다. 병든 회색의 달을 그려보고 있다.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바위에 파란 이끼가 앉고, 그 바위틈에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가 피는 조그만 뜰이 있는 내 집이 이 지구라는 푸른 별의 한 구석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사무치는 행복감을 느낀다.

흙에서 꽃이 피는 그 지구의 이치가 내 생활 속에서도 알뜰하게 구현(具現)될 것을 기원하면서 나는 또 이 멋있는 별에서의 행복한 잠을 자야겠다.

병든 달이여, 굳바이! (1975. 수필문학,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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