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움의 미학
양 채 영(시인)
고희연이 끝나고 손님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몇 개의 꽃다발과 선물꾸러미가 남고 빈 의자들이 휭하니 놓여 있다. 그것들이 모두 칠십이 된 내 모습 위에 겹쳐 있다.
나는 문득 시가 쓰고 싶어졌다. 이런 경우는 의도된 시 쓰기가 아니라 우연으로 촉발된 시 쓰기이다. 물론 그 배경의 정서에는 서럽다는 것이 미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 해석에 의한 ‘서러움’이란 슬픔의 다음 단계로서 상처난 슬픔이 덧쌓이고 곰삭아서 눈물도 비명도 사라지고 긴 한숨이 배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민요의 대부분이 서러움이란 정서를 지니고 있어 애처롭고 친근감을 갖게 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우리들의 전통적 정서의 큰 맥락에 서러움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내 고희연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어느 곳 어떤 때 들어도 아름다운 민요다. 강물이 굽이쳐 흐르듯 유장한 노래의 음률, 파도치듯 솟아올랐다 가라앉는 가락의 변화, 부드럽고 잔잔하면서도 애절한 이 노래는 참으로 우리 민요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말해주고 있다.
나는 늘 서정시에서 소리와 뜻이 아리랑처럼 어우러진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을까 고심한다. 언제 어디에서 읽어도 아리랑처럼 감동을 주는 시를 염원한다. 그것을 전통에 대한 조심스런 수용이기도 하다. 핏발선 메시지성 시편이나 현학 취미의 의미 전달에 경도된 시편들이 세를 누리는 세상에서 더욱 그러하다.
서러움이 내 우연성의 시 쓰기에 기여하고 있다. 졸시 몇 편을 소개한다.
노새야.
새끼도 낳지 못하는
노새야.
아무도 없는
아스팔트길을
똥 한번
제대로 누지 못하는
노새야.
털 빠진 가죽
등 허리로
힝힝 우는
노새야.
노새야.
부모의
다른 얼굴 틈으로
뻘뻘
땀만 흘리고 가는
노새야.
사람 없는
강가에서
억새풀이나
이가 시리도록
뜯어먹어라
노새야.
―「노새야」전문
60년대 후반인가 서울거리에서 노새가 달구지를 끌고 가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착상한 시편이다. 노새가 차들의 행렬 속에서 쩔쩔매는 모습이나 노새의 생태적 아픔 즉, 암말과 숫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변종으로 힘이 세고 일을 잘하나 생식력이 없는 나귀를 닮은 짐승이다. 그러므로 아스팔트 위에서 쩔쩔매는 노새는 서러움의 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시를 진정한 저항시라고 하고 국제사회 속의 한국이라고도 하며 시인의 자화상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든 이 시는 서러움이 깊어진 체념의 지경에 이른다. 많은 이들은 체념은 곧 모든 걸 포기한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소견은 그렇지 않다. 우리 민족이 껴안고 있는 저 깊은 체념은 너무도 큰 폭발력을 지닌 숨겨진 용암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땐가 분출하는 활화산의 모습을 상정해보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깊은 슬픔이 밴 시는 우리에게 감동과 충격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러움은 또한 이 나라 민초들의 정서에 주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탐관오리들에게 핍박받고 수탈당하고 멸시받아온 민초들의 서러움은 체념을 지나 한으로 맺혔다. 지금이라고 민초들의 서러움이 사라진 건 아니다. 고급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사흘이 멀다 하고 무슨 게이트 무슨 비리하면서 언론에 보도된다. 그러나 서러움의 계층은 단순 비교나 대응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속에는 노동자 귀족이나 권력층이 있고 문단에는 문단 귀족이나 권력층이 있다.
문단생활 40년의 변방을 떠돌면서 문단의 서러운 계층에 머물러 있다. 들과 산에 나가면 이름 모를 풀꽃들이 너무 향기롭고 아름답다. 그 풀이나 풀꽃을 보면 시가 쓰고 싶다. 『지상의 풀꽃』이란 한 권의 시집 외에도 풀꽃에 관한 시편들을 계속 쓰고 있다. 풀과 풀꽃을 서러움의 한 상징으로써 말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몸짓으로
비가 오면 비의 몸짓으로
이 지상에서 떠나지 않을 모양이다.
그는 누가 오시든
끝없는 존경으로 허리 굽혀
이 지상의 참얘기를 들려준다.
소리 없이 아주 작은 몸짓으로……
―「풀」전문
풀과 풀꽃은 작고 왜소하다. 이름이 드날리지 않았다. 그 이름이 생경하고 낯설다. 생명력이 강하다. 향기롭다. 번식력이 왕성하다. 모든 이의 관심밖에 있다. 무리 지으면 더 아름답다. 때묻지 않았다. 작은 꽃들이지만 특이한 색상들을 가졌다.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거부감이 없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힘센 권력이나 화려한 귀족성향과는 대척면에 서 있다. 만약 시의 소재나 시어를 선택한다면 풀과 풀꽃 같은 성향의 시어들이 적절한 듯하다. 무엇보다 서정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감정과 매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시어들은 풍부한 암시성과 은유와 울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잘것없고 사소한 일상성의 일들과 사물들이 빚어내는 일들과 형상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감동케 하는 것에 대해 시인의 오감은 끊임없이 떨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대한 정치적 이슈나 이념 타령으로 투사연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어쩌면 공허한 그림자나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지 궁금하다. 언젠가 한 세기만에 태어난 위대한 시인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던 어떤 다혈질의 평론가와 그 주변의 일군들이 생각난다. 세기적 위대한 시인이 당대에 규정되어질 수도 없고 당대의 평자가 단언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련의 태도들이 시(문학)를 오도하는 세력이 되기도 하고 근자에 생겨난 말이긴 하지만 ‘문학권력’을 형성케 하는 단초가 되는 건 아닌가 우려된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 속의 생활은 쾌도난마의 양단의 모습이 아니었다. 못다한 아픔이 쌓여 슬픔이 되고 슬픔이 덧쌓여 서러움이 되고 서러움이 곰삭아 체념이 되고 체념이 녹아 한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전통정서의 맥락이라고 여겨진다. 아리랑의 민요나 소월과 미당 그리고 박재삼의 시편들이 모두 이러한 전통정서 위에서 빚어진 것이다. 현대시의 깊은 저변에도 이러한 전통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산과 들에 안개처럼 자오록한 서러움의 기운, 자잘한 풀꽃의 색깔, 맑고 드높은 파아란 가을 하늘, 소쩍새 소리와 뻐꾸기 울음, 대금과 가야금 소리 모두 우리를 서럽게 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다시 생각해도
옥양목빛이었다.
눈으로 듣는
우리나라 산천의 화합,
숭늉에도 한 덩이 구름의 향기.
애무당들 고운 남치마 속이
태백이나 지리산에 걸쳐
징징 남도징소리를 낸다.
이제사 열리는 한 세상,
속눈썹이 길어서
칭칭 괴는 못물이 질펀하고,
부여나 삼한 때의
뻐근한 팔뚝바람이 뻗쳐
저렇게 향기롭고 귀하구나.
귀하구나.
―「벼꽃」전문
벼꽃 필 무렵에 들판 한가운데 서 있으면 알 수 없는 향기에 취하게 된다. 있는 듯 없는 듯 밀려오는 깊은 향기가 바로 한국적 향기가 아닐까.
(우이시 제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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