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과 동심
―어린 아이의 언어
이 무 원(시인)
시는 언어로 지어지는 진․선․미의 집이다.
진, 선, 미의 탐구는 인간의 본질 탐구이며 인간 이상의 구현이다.
이 집의 주인은 시를 쓴 시인이기보다는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독자들)의 것이 되었을 때 더욱 따뜻한 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집을 짓기 위해서 우선 이 집을 짓는 목수 즉, 시인은 미감이 뛰어나야 하고 그 정신은 숭고하고 고결해야 할 것이며 그의 집 짓는 기술은 평범한 사람과 구별되는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든 전문적인 솜씨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혼탁한 인간의 감정을 맑고 깨끗하게 세탁하여 진, 선, 미의 세계로 감화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사전적 의미로 느껴서 움직이는 마음속의 기분이나 생각, 의식의 주관적 측면, 감각이나 관념에 따라 생기는 쾌, 불쾌, 기쁨, 슬픔, 노여움 따위의 심리 현상을 뜻한다. 시는 정해진 유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을 둥그런 그릇에 담으면 둥근 물이 되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난 물이 되는 것처럼 시는 시인 자신의 주관에 의해 파악한 자신의 감정을 독백의 형식으로 들어내는 예술의 한 형식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을 어떻게 노래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내적 진실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시인이 필요 없는 시대인 것 같다. 독자가 없다.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시인들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비관적인 단견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시의 난해성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시는 읽어서 이해할 수 있어야 즐겁고 궁극적으로 시의 본질인 진선미의 감정을 환기시켜 줘야 하는데 그 동안 내용보다는 형식과 언어에 대한 실험이 일견 현대시의 특징인 것처럼 착각한 시인들의 시작 태도 또한 책임이 있다 할 것이며, 사회가 복잡해지고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 편리함과 신속함이 판을 치고 생산보다는 소비가 미화되고, 내일보다는 오늘의 가치를 더욱 인정하는 시대의 특징인 지적인 만족감보다는 현실적 포만감을 선호하고 정서의 풍요로움보다는 보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선호하는 시대의 탓도 있을 것이다.
탓을 하자면 학교 교육도 빼놓을 수가 없다.
시를 읽고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자극시켜 감동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입시 위주에 밀려 분석과 암기에 치중하다 보니 학생들의 머리에는 시가 골치 아픈 것으로 자리잡고 만다. 또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독자의 안이한 독서 습관도 이유 중의 하나로 본다.
방정환 선생님은 그의 ‘어린이 찬미’ 라는 글에서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본 것 느낀 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운 마음을 가지고 어여쁜 눈을 가지고 아름답게 보고 느낀 그것이 아름다운 말로 굴러 나올 때, 나오는 모두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여름날 성한 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어 나무를 흔든다. 보는 것도 그대로 시요, 오색의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하느님 따님이 오르내리는 다리라고 하는 것도 그대로 시다." 라고 말씀하셨고,
중용에는 "하늘이 인간에게 말하여 내려주신 것이 本性이고 본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道이며 이러한 도를 닦는 것이 敎이다" 라고 했다.
시의 언어가 진실되고 아름다워야 한다면 그 지고지순한 언어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방정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린아이의 언어다. 어린아이의 말은 그 자체가 시이며 본성의 소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린아이의 입에는 젖내가 나고 향기로우며 그 애의 눈은 맑고 깨끗하며 그 애의 귀는 태초의 음악으로 가득 차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애가 하는 말은 순수 덩어리, 거짓도, 과장도, 비꼼도,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의 원형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린아이가 지닌 이 본성을 지켜가지 못하고 길게 늘이거나 짧게 줄이고 굴절시킴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변형시키고 가지각색으로 색을 칠하고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방황과 혼란과 아집 속에 우리를 던져버린다. 우리 시인의 역할은 이 본성, 즉 진선미를 다시 찾아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동심의 세계는 유치찬란하다.
나는 그 동심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 쓰는 것이 어느 면에서 기성시인들이 머리에서 만들어내는 시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언어를 거느린 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순한 즐거움이나 기쁨을 전달해 준다는 면에 있어서 이보다 진실된 시가 있을까. 진선미에 이르는 길은 깊이와 높이와 넓이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어린이의 말과 성장 과정을 그대로 옮긴다고 해서 그것을 동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동시는 어린아이를 위한 시인데 이 시는 어른이 읽어야 더욱 재미있게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기쁨과 행복이란 뜻을 알게 되었다. 이제 6살이 된 내 손녀 서하 때문이다. 그 아이가 있는 자리엔 기쁨이 꽃을 피우고 행복이 밝은 미소를 짓는다. 길을 가다가도 나는 그 애 생각에 혼자서 푸득푸득 웃기도 하고 새도 되고 구름도 된다.
그리고 그 애가 내 집에 오면 나는 천국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우쭐댄다. 나는 그 애의 충실한 하인이 되어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누우라면 눕고 가라면 간다. 때로는 말이 되어 “히잉” 울기도 하고 원숭이가 되어 얼굴을 긁기도 한다.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난 1999년 6월부터 지금까지 이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과 말과 기쁨을 「서하 일기」란 연작으로 쓰고 있고 더러 발표도 했다. 물론 시의 형상화나 구조 등 시론을 동원하여 비판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동안 쓴 「서하 일기」 몇 편을 읽어본다.
(화분에 핀 철쭉을 보고)
"할아버지, 이리와 보세요
꽃이 피었어, 핑크야
아! 예쁘다
감사"
"뭐가 감사해?"
"예쁘니까"
―서하일기․43
(할아버지가 점심에 제육볶음을 먹었다고 하자)
"제육볶음이 뭐예요?"
"돼지고기 볶은 거야"
"움직이는 돼지 먹었어요,
안 움직이는 돼지 먹었어요?"
"안 움직이는 돼지"
"움직이는 돼지 먹으면 어떻게 돼요?"
―서하일기․68
(가위바위보를 하다가 서하 하는 말)
"서하가 지면 다시 하는 거예요"
(안개꽃을 보고)
"애기꽃이네"
(아파트 마당에서 씽씽카를 타다가 갑자기 멈추며)
"개미야, 빨리 지나가라"
(존대어를 배우며)
"할아버지, 오늘 아빠 차 타고 오다가 갈매기 봤다요"
(할아버지 수염을 보고)
"할아버지는 수염 난 꽃이예요
하하"
100여 편의 연작을 쓰면서(전달하면서) 그 동안 나는 60여 년 동안 낡고 마모되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동심,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나 언어의 세계를 이 아이를 통해 생생하게 보고 다시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귀하고 아름답고 값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바로 어린 시절의 나와 대동소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모습을.
내가 언제쯤 왜 엄마라는 말을 했는지?
내가 금붕어를 봤을 때 금붕어 이름을 무엇이라 지었는지 ?
우리는 누구나 확인하지 않고도 대충 모든 행동이나 사물을 인지하고 추측하지만 확인되었을 때 우리는 안도하고 기뻐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는 갈 수 없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응애, 응애” 울어보는 것이 어찌 재미만 있는 일이겠는가.
오늘은 서하가 할아버지 집에 와서 말을 안 듣는다고 야단을 맞고 제 어미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나 서한데
왜 나는 말을 안 듣지?“
하고 물어본다.
(우이시 제1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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