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집안․2―김창협 일가 / 조 영 님
조선시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문벌로 김창협 일가 역시 이름이 높다. 본관은 안동으로 좌의정을 지낸 尙憲이 증조부이며, 부는 영의정 壽恒이다. 어머니는 安定 羅氏로 해주목사 星斗의 딸이다. 수항은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집(昌緝) 형제를 두었다.
증조부 尙憲(1570~1652)은 호가 淸陰. 石室山人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尙容의 아우이다. 상헌 역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가 다시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뒤 풀려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김상헌은 절의의 인물로 알려졌다. 그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널리 인구에 회자된 작품이기도 하다.
부 壽恒1629~1689)은 자 久之. 호는 文谷이다. 김장생의 문인인 송시열. 송준길과 종유하였으며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 한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었던 관계로 그는 소론 명류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그의 변려문은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으며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하여 전서와 해서 초서에 모두 능하였다고 한다. 한때 사색당파 싸움에 휘말려 경신대출척 때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복귀하고 그 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탄핵을 받아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수항의 첫째 아들 昌集(1648~1721)은 자는 汝成이며 호는 夢窩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노론으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고, 1721년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하였다가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고 수개월 뒤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자 노론의 반역도모를 무고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昌協(1651~1708)은 자는 仲和. 호는 農巖․三洲이다. 한 때 승정원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의,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한 바 있으나 아버지가 기사환국으로 사약을 받자 현실참여를 거부하고 강호자연으로 돌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대제학, 예조판서, 이조참판 등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설을 절충하였다. 일반적으로 시보다는 문에 능하였다고 평되었다. 특히 고문에 솜씨를 보여 典雅한 그의 문장과 박지원의 웅혼한 문장은 일시에 쌍벽을 이루었다. 다음의 시를 감상하여 보자. 제목은 「백부의 제백운에 삼가 차운하다(敬次伯父題壁韻)」이다.
다만 청산이 나를 속이지 않으리니 只有靑山不我欺
돌아와 서로 대하며 매번 의지하리라 歸來相對每依依
화음화조가 어찌 같음을 알리오 華陰花鳥知何似
양쪽 땅은 응당 같건마는 세상 밖을 기약하리라 兩地應同物外期
세상 모든 것이 농암을 속일지라도 오직 자연․청산만은 속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연에 귀의하여 물외를 기약하리라는 의지가 담겨 있는 시이다. 실제 그는 아버지가 정쟁에 희생되면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단호히 버리고 강호자연으로 돌아가 전원에서 사는 것을 분수로 여기고 살았다.
한편, 김창협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性情과 天機를 강조하여 시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시는 인간의 성정이 드러난 것이고, 천기가 유동한 것으로 이러한 시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작가의 꾸밈없는 감정과 개성이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의 아우 昌翕 역시 ‘시는 성정만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시에 있어 ‘眞’과 ‘新’을 특히 강조하였다.
농암에게는 崇謙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 아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시는 사람에 있어서 얼굴에 눈썹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시절이 위태로워 온갖 생각에 강물 소리를 듣고 있다.(時危百慮聽江聲)’란 글귀를 지었는데 시인 홍세태가 막 밥을 먹다가 이 글귀를 듣고 깜짝 놀라 수저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가 너무 일찍 노숙해졌고, 또 너무 지나치게 슬픈 뜻이 있어서 김의 재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때문에 걱정하더니 과연 일찍 죽었다고 한다. 싹만 자라고 이삭이 패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任璟의 『玄湖𤨏談』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昌翕(1653~1722)의 자는 子益이며 호는 三淵이다. 과거에 관심이 없었으나 親命으로 응시하여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白岳 기슭에 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충격을 받아 애통해하다 결국 세상을 뜬다.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으며, 문보다는 시에 뛰어나 역시 형의 문장과 병칭되기도 한다. 다음의 시는 만년에 지은 「葛驛雜詠」 연작시 가운데 한 수이다.
보통 때처럼 밥먹고 사립문 나서니 尋常飯後出荊扉
문득 범나비 나를 따라 나네 輒有相隨粉蝶飛
삼밭 뚫고 보리밭둑 어정어정 걸어가니 穿過麻田迤麥壟
풀꽃과 가시가 쉬이 옷에 걸리네 草花芒刺易罥衣
자연에 묻혀 사는 시인의 일상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참 맛인 듯하다. 시를 통해, 자연을 통해 삶의 어떤 의미를 구태여 드러내려 하지 않은 점도 좋다.
다음의 시는 격조 높기로 이름난 「曉吟」이란 시이다.
새벽에 일어나 초당에 앉아 있자니, 그믐달 어리비춰 영창이 허옇구나/
은하수 그림자 밝다 못해 보얗고, 마을의 닭소리 끊겼다 이어지네/
사면을 둘러봐도 인적은 고요하고, 줄을 벌인 갈거미 허공에 매달렸다/
하얀 이슬 밤새껏 흥건히 내려, 가을 산 나무숲 기름에 헹궈낸 듯/
묻혀 사는 몸이라 무슨 멋 있으련고, 온갖 경치 나날이 을씨년스럽다/
신을 끌며 혼자서 서성거리자니, 그윽한 이 가슴 오히려 허전하이/
(曉起坐茅亭, 微月當窓白. 河漢影淸淺, 村雞聲斷續. 四顧聞無人, 蟰蛸挂虛壁.
白露夜來濕, 秋山似膚沐. 端居不可道, 景物日蕭索. 蹤履獨彷徨, 幽懷更寂寞.)
적막한 새벽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법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이런 새벽의 정경을 통해 느껴지는 시인의 감수성이 신선하다. 평소 두보의 시를 애송한 탓인지 생활주변으로부터 시적 소재를 찾아 묘사한 점이 돋보인다. 일찍이 洪愼猷는 ‘三淵이 문호를 따로 열어 조선에 새로운 분위기가 일어났다.’고 하였듯이 18세기 시단에 새로운 이론과 창작의 실천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은 바 이것을 입증하는 시라 할 수 있다.
昌業(1658~1721)은 자는 대유. 호는 가재․노가재로 17세기에 활약한 노론의 정치가이며 수항의 넷째 아들이다. 특히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역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세상을 멀리하였다. 사창을 설치하고 거문고와 시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중국 산천을 보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여기다가 형 창집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 이때 보고 들은 것을 모아 『가재연행록』을 펴냈는데 이것은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제도와 중국 유생들과의 대화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 연행록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그의 그림에 대한 취향은 서자인 允謙에게 이어져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한 實景山水畵에 큰 영향을 미쳤다.
昌緝(1662~1713)은 수항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문장과 훈고에 능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김창협 일가는 조부 상헌의 절의와 아버지 수항의 뛰어난 시문을 이어받아 하나같이 여러 형제들이 모두 시문에 특출해서 당시 石室學派라고 불렸으니 중국의 三蘇에 버금간다고 할 만하다.
(우이시 제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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