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한담(漢詩閑談)

백운거사 이규보 / 조영님

운수재 2007. 11. 9. 06:10

 

 

白雲居士 李奎報 /  조 영 님

 

 

한국 한문학사에서 있어 이규보의 위상은 자못 크다. 고려 오백 년을 통틀어 제일가는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으며 그의 시문은 기세가 웅장하고 豪健하여 東方詩豪는 오직 이규보 한 사람뿐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동명왕편>은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여섯에 지은 민족 서사시로 이것은 한국 서사문학의 한 좌표를 이루었다. 시문뿐 아니라 그가 펼친 創新論의 시론은 고려 시론의 핵심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寒微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仁低였으나, 사마시를 보던 날 꿈에 奎星이 과거에 오를 것을 알려주어 합격하였으므로 규성의 報應이라하여 그때부터 이름을 奎報로 고쳤다고 한다. 규성은 文運을 맡은 별자리이다. 그래서인지 열 살도 되지 않아 글에 능하여 이미 奇童으로 불렸다. 관례도 하기 전에 당시 문명을 떨친 오세제는 30여 세가 차이가 났지만 이규보와 한 번 대면하고는 不忘之交를 허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매인 데가 없어 소년시절부터 詩酒를 즐겨하다가 과거에 세 번이나 낙방하는 고배를 맛보기도 한다. 白雲은 스스로 지은 호로 ‘집안에는 자주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잇지 못했으나 스스로 유쾌하게 지냈으며 그러면서도 성격이 소탈해서 단속할 줄 모르며 육합을 비좁게 여기고 천지를 협소하게 생각했다’고 <白雲居士語錄>에는 전하니 그의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겠다. 40세 이후로는 출세가도를 달리지만 40세 이전까지는 벼슬이 신통치 않아 고위 관료에게 자신의 시재를 과시하면서 벼슬을 구하는 이른바 ‘求官詩’를 많이 남기기도 하였다. 일견 점잖은 사대부에게는 비굴한 처세일 수도 있으나 이규보는 이러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物은 道의 기준이다. 그 物을 그 기준에 따라 지킨 후에 道가 존재한다. 만약 物을 버린다면 道를 잃게 된다. 官은 道의 기구이므로, 道를 지키면서 官을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이 도의 기준이며 관이 도의 기구라는 말은 당시 사대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사유방식이었다. 도를 이루기 위해서 관직은 절대 필요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규보는 시․술․거문고를 몹시 좋아하여 스스로 三酷好先生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다음의 시에 드러난다.

 

그대는 옛날 周太常을 보지 못하였는가

일년 삼백 오십 구일 재계하여 맑은 것을.

또 지금 이 춘경을 보지 못하였는가

일만 팔십 일을 지나 오늘 다행이 술이 깬 것을.

태상의 아내는 되지 말아라

한번만 엿보면 재계를 범하였다고 노한다.

춘경의 아내는 되지 말아라

취하여 거꾸러져서 함께 하지 않는다.

 

주태상은 후한 때의 사람인 周澤이다. 태상은 벼슬이다. 주태상은 직언을 잘하고 종묘를 극진히 공경하였는데, 어느 날 병으로 누워 있게 되자 아내가 걱정이 되어 와서 아픈 곳을 이곳저곳 물어보았다. 그러자 주태상이 화가 나서 아내를 옥에 가두었으니 죄명은 齋禁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다 이르기를 ‘세상에 태어나 운명이 기구하여 태상의 아내가 되었구나. 1년 360일에 359일을 재계를 하다니!’하면서 그후 남편과 해로하지 못하는 여인을 태상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처는 태상의 처와 무에 다를 것이 있는가?

 

이규보는 평생에 지은 시가 7천~8천 수에 이른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는 약 2,000여 수가 실려 있다. 만년에 그는 많은 시고를 불태워버렸다. 그 이유를 ‘뒷날에 다시 검열해 보니/ 작품마다 좋은 글귀 하나도 없네/ 차마 상자를 더럽힐 수 없어/ 불살라서 밥 짓는 데 버렸네/’라고 하였다. 그는 시 짓는 일을 전생의 빚이라고 하였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기 싫을 때 안 쓰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고 한다. 그래서 병이라고까지 하였다. 다음의 시는 <詩魔>이다.

 

낮이나 밤이나 심간을 깎아서     日月剝心肝

몇 편 시를 짜내네                      汁出幾篇詩

비계나 기름은 말할 것 없고        滋膏與脂液

살갗조차 남지 않겠네                不復留膚肌

뼈만 남아 괴로이 읊조리는         骨立苦吟哦

이 모습 참으로 가소로와라         此狀良可笑

 

위의 시에서 말한 심간을 깎다 못해 뼈만 남기는 고역을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감할 것이다. 이 시마는 ‘살고 죽는 것이 이로 말미암으니, 이 병에는 의원도 의원 노릇하기 어려운’ 고질병 중에서도 고질병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시마의 죄목을 다섯 가지로 조목조목 들어 저주하고 쫓아버리는 글(<逐詩魔文效退之送窮文>)까지 쓴다. 시마의 죄는 이렇다. 1.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2. 시는 조화․신명의 영묘함을 누설한다. 3. 시는 거침없이 취하고 읊어 끝없이 자부심을 갖게 한다. 4. 시는 賞罰을 멋대로 한다. 5. 시는 靈肉을 다 여위게 하고 상심시킨다. 사물에서 흥기하니 자연 마음이 들뜨게 마련이고,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의 비밀을 누설할 것이며,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만이 안다는 자부심이 들 것이다. 더욱이 사물의 이치를 이러쿵저러쿵 나름대로 따지다 보면 좋고 나쁨의 시비를 가릴 것이니 이러한 과정 속에 고뇌하고 상심하여 영혼과 육체가 다 여위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역대의 시선집에 두루 실린 <夏日卽事>를 감상하여 보자.

 

대자리 홑적삼으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輕衫小簟臥風欞

꾀꼴 울음 두 세 소리에 꿈이 깨어라                夢斷啼鸚三兩聲

빽빽한 잎새 가려진 꽃 봄 늦도록 남고             密葉翳花春後在

엷은 구름 새로 비치는 햇살 빗속에 밝아라      薄雲漏日雨中明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은 한결같이 곱다는 것이다. 바람 부는 마루에 대자리 깔아놓고 홑적삼 걸치고 누워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꾀꼬리 소리에 낮잠을 깬다. 잠깬 눈으로 꽃 피고 난 뒤 무성해진 잎새 사이로 아직은 남아 있는 꽃이 보이고, 어느 결에 지나간 부슬비 속에 여름의 햇살이 구름 사이로 환하게 비추고 있다. 대자리, 홑적삼, 꾀꼬리, 꿈, 가려진 꽃 등의 소재는 여름날의 한가로움과 권태로움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어서 이러한 화평한 분위기 속에서 봄이 간 뒤 무성한 잎새로 보이는 몇 송이 꽃이며, 빗속에 빛나는 햇살을 사뭇 대조적으로 포착한 시인의 안목은 예사롭지 않다. 봄이 삶의 절정이라면 그 절정의 뒤에 보이는 우수와 좌절과 체념이 翳花일 것이요, 비가 삶의 질곡을 의미한다면 그 질곡 속에서도 가느다란 희망과 같은 것이 구름 사이로 터져 보이는 햇살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시인은 삶의 절정과 질곡 사이를 고운 시어로 잔잔하게 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규보의 뒤를 이어 고려시단에는 崔滋, 金坵, 金之岱, 郭預, 洪侃, 李藏用 등과 같은 시인들이 대거 배출되어 명편들을 남기게 되었으니 이규보가 시단에 미친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우이시 제1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