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적인 것과 시 / 장석원

운수재 2007. 11. 23. 07:41

 

 

시적인 것과 시

장 석 원(시인)

 

시는 많은데, 시적인 것은 많지 않다.

서정시는 많은데, 서정적인 것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읽는 시의 대부분은 시적이지 못하다. 서정이라는 보호막을 쓰고 있다. 나 자신도 그러하고, 당신도 그러하고, 우리도 그러하다. 시의 나라, 대한민국에 살면서, 쓰면서, 읽으면서, 수많은 시를 경험하면서 나는 시적인 것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이 시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다. 분명 시인데, 그 안에는 시가 없다.

다음의 시는 시적인가?

 

오늘 아침 성냥에 불을 붙여요, 혼자 있게 되지는 않을 거에요 / 그녀가 조용히 누워있는 듯해요, 곧 밤이 끝날 테니까요 / 오, 나는 팔을 뻗고 서 있을 거에요, 마치 어디로든 떠나갈 수 있는 듯이 / 오, 내 길을 만들어 갈 거에요, 끝까지, 지옥에서 하루를 더 있는다 해도

 

얼마나 많은 차이가 그것을 만드는가 / 얼마나 많은 차이가 그것을 만드는가

 

나는 촛불이 내 팔을 태워버릴 때까지 들고 있을 거에요 / 오, 나는 피곤해질 때까지 나를 타격할 거에요 / 오, 나는 내 눈이 멀 때까지 태양을 바라볼 거에요 / 이봐요 나는 방향을 바꾸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나는 내 마음도 바꾸지도 않을 거에요

 

얼마나 많은 차이가 그것을 만드는지 / 음, 얼마나 많은 차이가 그것을 만드는지…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 면역이 될 때까지 독을 삼킬 거에요 / 내 폐가 쏟아져나와 이 방을 채울 때까지 나는 소리지를 거에요

 

얼마나 많은 차이가 / 얼마나 많은 차이가 그것을 만드는지

-「Indifference」 전문

 

이 시에서 에디1)는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여 이별의 고통을 절절하게 형상화한다. 1연에 나오는 촛불을 화자는 2연에서 팔이 타버릴 때까지 들고 있겠다고 다짐한다. 연인과 이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눈이 멀 때까지 태양을 쳐다보겠다고 말한다. 고통을 겪는다 해도 화자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상처와 아픔의 원인인 이별. ‘얼마나 많은 차이’가 그 이별을 만들었냐고 그는 되뇌인다. 그녀와 ‘나’ 사이에 수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신분의 차이일 수도 있고, 성격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화자는 자신과 그? ?사이의 차이를 명백하게 파악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자신의 차이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의 원인인 이별이, 이별의 원인이었던 차이가 있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차별이 사랑의 실패를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적인 어떤 차이가 두 연인들에게 차별이라는 사회적 억압으로 작동되었을 가능성을 상상하면서 시의 다음 구절로 넘어간다.

 

화자는 극단적이다. 면역이 될 때까지 독을 삼키겠다고 말한다. 헤어진 그녀를 잊기 위해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독이라도 마시겠다는 화자의 외침이 갑자기 공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의 화자가 겪고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그 누구도 떠나간 그녀를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사랑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폐가 쏟아질 듯이 소리를 지르겠다고 선언한다. 극단의 고통이 찾아온다. 자신의 몸이 파열되더라도 이별의 통증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더 큰 고통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화자의 다짐은 이 시를 처절하고 선연한 상실의 경지로 몰고 간다. 고통의 극한으로 화자를 끌어들인 상처받은 사랑 그 원인이 ‘차이’이다.

 

이 시의 마지막 비유는 제목에서 드러난다. ‘차이(difference)’가 ‘무관심(indifference)’이 되었다. ‘difference'에 접두어 ‘in’이 붙어 무관심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차이 → 무관심’의 변화 과정은 아름다운 은유를 상기시킨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사랑의 실패를 불러오는 무관심이 된다. 그 차이가 사랑의 매개가 될 수도 있지만, 차이는 뛰어넘을 수 없는 사랑의 절벽이 될 수도 있다.

 

에디 베더는 사랑의 본질을 담담하게 읊조린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기에 떠날 수밖에 없던 ‘나’가 할 일은 기다리는 일뿐이고, 그 기다림이 가져오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을 화자는 극단적인 비유로 드러낸다. 헤어진 ‘나’는 어떤 고통이 밀려온다고 해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 팔이 불 타 재가 되어도, 눈이 멀어도, 폐가 터지도록 소리를 질러 자신의 육체가 무너진다고 해도 ‘나’는 사랑을 버릴 수 없다. 죽어 이룰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날 미치게 했어요 / 마침내 당신이 내게 온 후에 나는 혼란에 빠져요 / 나는 당신의 등장을 되돌려요 / 당신이 내 머릿속에서 배회하지 못하게 / 나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을 갖고 싶지 않아요 / 당신의 빵을 먹느니 굶겠어요 / 걸을 수도 없지만 뛰겠어요

―「corduroy」 부분

 

“기다림이 날 미치게 했다”는 첫 구절은 강렬한 은유이다. 기다리는 모든 자들은 미치기 쉽다. 기다려본 모든 자들은 이 말의 의미에 본능적으로 동의한다. 바라던 것을 기다리는 순간이 있고, 원하지 않지만 예정된 것을 기다리는 순간이 있다. 두 기다림 전부 기다리는 주체에게는 자신의 상실을 불러올 만큼의 초조와 불안과 고통을 야기시킨다. 기다리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2) 이 시의 화자는 기다림 때문에 미쳤다고 선언한 후에 마침내 자신의 머리속을 거닐고 있는 타자 ‘당신’을 말한다. 화자는 고통스럽다. ‘당신’이 등장하자 모든 상황을 이전으로 되! 돌리고 싶다. ‘당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는 갖고 싶지 않다. 때문에 ‘당신’의 빵을 먹느니 차라리 굶겠다고 다짐한다. 걸을 수도 없지만 뛰겠다고 말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왜 ‘나’가 이러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화자는 자신을 미치게 했던 기다림 이후의 상황을 역설과 은유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말이 공허해요. 그녀에게는 가까이 할 복수의 자리가 없어요. / 이 세상에서 위안을 찾을 수 없어요. / 인조 눈물, 찔린 용기, 다음은, 지원병 / 깨지기 쉬운, 지혜는 고정될 수 없어요

 

게으름뱅이는 집을 찾아요 그리고 나는 계속 되기를 원해요 / 그러나 태양 속에 쪽문이 있어요. 불멸 / (…) / 항복했고, 처형되었고 / 휘갈겨 쓴 글씨가 해독되고, 마루 위의 담배갑

 

게으름뱅이는 집을 찾아요 그리고 또한 나는 계속 되기를 원해요 / 그러나 태양 속의 쪽문을 봤어요 / (…) / 그리고 배수구 속의 수염. / 게으름뱅이는 움직여요. 오래 머물 수 없어요. /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죽어요. 오!

-「immortality」부분

 

불멸하는 이미지에 대한 송가인 이 노래의 가사는 단절과 비약이 심해서 논리적으로 연결시키기 어렵다. 에디는 이 시에서 불멸의 속성을 예리한 이미지로 표현해낸다. 동원된 불멸의 이미지는 모두가 은유이고, 이 은유의 폭은 선(禪)적인 정취까지 품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truant’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기는 작업 역시 어렵다. 일단 사전 정의를 따라 ‘게으름뱅이’라고 하자. 이 시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 시의 핵심은 불멸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중첩되고 있는지, 그것들이 우리 삶의 어떤 것을 불멸하는 것으로 만드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태양 속에 쪽문이 있다”는 이미지를 보자. 태양의 나이는 45억년쯤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나이가 45억년이라는 뜻이다. 산술적으로는 45억년을 셀 수 있으나, 이 숫자가 삶의 구체적인 감각으로 전환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불멸하는 것으로 태양을, 태양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태양에 쪽문이 있다. 태양 속의 쪽문을 열고 나가면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그 문 너머에 죽음이 존재하지 않을까. 에디의 이 구절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운명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그 죽음을 긍정하고 새 세상을 향해 떠난다는 운명적 순응이 있다. 이것이 불멸 아닐까. 45억년 된 태양이 아니라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운명,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는 우리가 바로 ! 불멸 아닐까.

 

불멸의 이미지는 사실 추상적이다. 관념에 그치기 쉽다. 에디는 불멸의 이미지를 순간의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마루 위의 담배갑”과 “배수구 속의 수염”은 일상의 한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속절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시인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것들이 불멸할 수 없는 생의 한 부분임을 거부할 수 없다. 바람 속의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삶의 순간을 시인은 불멸하는 이미지로 바꾸었다. 불멸하기 위해 불멸할 수 없는 우리들은 불멸하는 이미지에 삶을 의탁한다. 이미지 속에서 우리들은 ‘살기 위해 죽을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한 생애는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도 ‘나’가 남겨놓은 이미지는 육신의 삶을 넘어서 다른 세계로 이월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태양 너머, 불멸을 향! 하여… ‘나’와 ‘너’와 ‘우리’와 시인은 함께 태양의 쪽문을 연다.

 

위의 가사는 시인가? 아니면 대중음악의 가사에 불과한가?

시적인 것과 시의 차이. 분명 시이지만 시적이지 않은 시가 있다. 시는 아니지만 시적인 텍스트들이 많다.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나의 시는 시적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시는 시적인가? 결국, 나와 당신과 우리의 시는 시인가?

                                                                                                                         (우이시 제20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