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상의 물상에서 하늘의 별까지 / 김판용

운수재 2007. 12. 19. 07:05

 

 

지상의 물상에서 하늘의 별까지 / 김판용(시인)

 

 

‘무엇이 시가 되는가?’, ‘아니 시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문학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게 있어 화두話頭이다. 시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은 사실 시에 대해서 잘 모른다. 왜 쓰냐고 물어도 명쾌한 답을 말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 그것이 운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 이걸 어떻게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산악인들이 ‘산이 있어서 그냥 오른다’고 한 대답은 멋은 없지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촌철살인과 같은 대답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운명에 부딪혔을 때, 아니 그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때만 가능하다. 산문의 수도승들이 화두를 붙잡고 있는 이유는 결국 욕망을 벗어나야 한다는 운명과 만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예술가도 어찌 보면 그런 면이 강하다. 수도승들과 다르다면 아예 탐욕의 세계에 발을 담그려고 하지 않는데 반해, 예술인들은 경우 다양한 경험들을 가치화 한다는데 있다. 그러니 경험이 없는 예술가의 세계는 천박할 수밖에 없다. 천상의 예술가란 그래서 가장 낮은 것들에서 가치를 찾아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시를 비롯한 예술을 자신의 악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한다. 남 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승복을 입고 절에 들어와 폼 잡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참선하는 승려들의 입장에서 어떨까? 아마 몽둥이를 들고 내쫓을 것이다. 운명으로 알고 시를 쓰는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시를 들먹인다면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앞서 나는 경험을 가치화 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말을 했거니와, 시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넘긴 것들 속에서 깨달음(가치)을 찾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 속에는 시의 혼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시이다.

 

그래서 노래하는 시인, 춤추는 시인 등 ‘시인’은 등신대等身大의 예술세계와 일치한다. 그렇게 시가 위대하지만 정작 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들은 자잘하다. 길가의 풀 하나 나뭇잎 하나에서 우주를 꿰뚫는 통로를 발견한다. 그냥 떨어지는 꽃잎 하나가 그래서 온 세상을 흔들 수도 있다. 꽃의 움직임이 곧 본질이라면 세상은 한없이 흔들리는 것이다.

 

어느 이른 아침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가는 길이었다. 떡장수 할머니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 할머니는 천 원짜리 돈에 침을 발라 머리에 연신 부비면서 ‘고수레’를 외친다. 고수레라면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 떼어서 귀신에게 바치는 주술적 행위인데 돈을 머리에 바르면서 고수레는 어쩐지 안 어울려 보였다.

정성스런 그 할머니의 고수레 의식이 끝나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던진다.

“그래, 그렇게만 허드라고……”

그리고 둘 사이에는 아주 냉랭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 앞에 벌어진 상황을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의식과 던져진 말 한마디로 이야기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아마 퉁명스럽던 그 할머니는 자신의 손님을 빼앗아 갔거나 둘만의 룰을 어기고 인심을 더 썼을 라이벌에게 그렇게 하면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것이고, 그렇든 저렇든 일찍 마수걸이를 한 할머니는 이렇게만 돈이 벌리라고 연신 자기 머리에 돈을 부비며 ‘고수레’를 외쳤던 것이라.

돈에 침을 발라 그렇게 머리에 바른다고 해서 더 많이 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에 그 할머니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래, 그렇게만 허드라고……’라는 짧은 한마디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 도리道理, 즉 상도商道를 지키라는 꾸짖음과 그래도 계속하면 좌시하지 않고 응징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시인은 그렇게 작은 이야기들에서 가치를 찾아 하늘의 별로 반짝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무당과도 같은 것이다. 어느 가을 예쁜 감국을 꺾기 위해 차를 세웠다가 망자의 얼굴처럼 오므리고 있는 신발을 보고 쓴 시다. 죽음의 흔적으로 나뒹구는 신발 위로 겹쳐지는 시간들을 잡아본 것이다. 이것이 내 시의 길이고, 또 높은 절벽이기도 할 것이다.

 

버려진 신발은 죽음의 얼굴이다.

깡통처럼 쭈그러진 자동차 밑이나

저승의 고요 같은 저수지,

그리고 하늘 대롱거리는 밧줄의 나무 밑에

언제나 신발만 나뒹굴었다.

 

하얗게 어지럽게 정지한 바퀴들

그 상처 옆에 핀

예쁜 들국에 홀려 차를 세우니

뒷창이 접힌 밤색 구두 한 짝이 얼굴을 오므리고

풀섶에 누워 있다.

 

한 생을 부지런히 움직였을

주인을 잃은 구두의 벌어진 입에

들꽃 한 줌 꺾어 넣고는

눈 시린 가을 하늘 끝

나를 키운 신발들 걸어본다.

 

검정고무신… 운동화… 군화… 구두…

 

밟아온 시간의 발자국 같은

구름 몇 점 비껴서

하얀 반달 둥둥 떠간다.

                                                                                                                                        (우이시 제2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