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김소양

운수재 2007. 12. 16. 09:07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김소양

 

 

#1. 시는 내게 무엇인가?

- 길에서 죽은 백구

 

몇 해 전 여름밤이었다. 분당에서 용인 쪽으로 난 고속화도로를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창문을 열고 무심히 지나가는 내 옆, 중앙 분리대 쪽으로 덩치가 꽤 큰 물체가 헉헉거리며 쓱 지나쳤다. 순간 소름이 돋으며 서늘한 물줄기가 등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내 차에 치일 뻔하지 않았는가. 깜짝 놀라 뒤돌아봤더니, 커다란 백구였다.

백구는 이미 저만치 뒤에 있었다. 잠시 곁을 스쳤던 거친 숨소리로 미루어보아 무척 지치고, 목이 마르며 허기가 진 것 같았는데… 역주행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그 녀석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저만치 뒤에서 쌩~하니 달려오는 차들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며칠 뒤, 그 개가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시 그 근처를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백구 한 마리가 숨진 채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며칠 전에 내가 봤던 바로 그 백구였을까? 가슴에 무언가가 쿵 내려앉았다. 어떤 의미로든 이 세상에 태어난 목숨 하나가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개죽음’이라더니!

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왜 뜬금없이 그 백구 생각이 나는 걸까?

 

#2.시가 내게로 왔다

- 잊을 수 없는 두 분 선생님

 

중학교에 다닐 때, 대학을 갓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오신 국어선생님은 내 우상이셨다. 가르치는 방식도 신선했으며, 예쁘고, 노래도 잘 불렀고, 멋쟁이셨다. 선생님은 우리 삶의 윤활유가 바로 ‘문화’라는 것을 스펀지와 같은 내게 알려주신 분이었다.

한글날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은 나를 불러 한글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라고 하셨는데, 시를 써본 적이 없다고 하자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 줄 터이니 선생님 댁으로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 바깥분은 부산에 꽤 널리 알려진 조순 시인이셨다. 그렇게 선생님 댁을 찾아간 나를 앉혀놓고 조순 선생님은,

“아기가 웃는다고 하면 어떻게 웃는지 알 수 없지만 해바라기처럼 웃는다고 하면 어떻게 웃는지 눈에 보이는 거 같지 않니? 그게 시란다.”며 시 강의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형기 시인의 시집 『적막강산』을 읽어주시며 시의 씨앗을 내 마음 밭에 뿌려주셨다.

햇살 가득한 그날, 선생님 댁 창밖으로 보이던 가을 바다와 하늘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빛나는 시간을 어찌 잊겠는가.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얼토당토않게 부산시 주최 한글 백일장에서 중등부 장원을 했다. 참으로 운수대통했다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게 시는 내 삶에 여린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게 되었다.

 

#3. 시를 숨쉬다

- 삶이 된 시

 

그렇게 마음속에 뿌리내린 시 덕분에, 나는 어머니 눈을 피해가며 시집을 줄기차게 사서 읽고, 시를 줄기차게 썼다. 시는 내가 숨쉬어야 할 맑은 공기와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시를 쓸 때는 깨끗이 씻고 책상도 말끔히 닦은 후 원고지 앞에 앉았다.

 

하늘 냄새로 하여

노래 솟구치는 날

음계가 틀려

한 옥타브 낮은

하   니

   모    카

아, 바다는 멀어

                   - 고등학교 때 쓴 「경부선」 전문

 

그리고 대학에 합격하여 서울에 올라왔다. 세상은 넓고 배움의 바다는 무한히 넓다지 않은가. 어차피 죽을 때까지 시를 쓸 건데 굳이 문리대를 갈 필요가 있겠느냐며 호기 좋게 나는 사범대학교 교육학과 학생이 되었다. 아뿔싸! 철없는 나는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섰다.

다행히 내가 다니게 된 학교 가까이 박두진 선생님께서 계셨기에, 하늘처럼 여기며 글로만 뵙던 청록파 시인을 가까이서 뵙는 복을 누릴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수석이 가득 놓여진 서재 좌탁 앞에서 늘 맑은 미소로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시를 원고지에 꼭 써라’, ‘음악을 듣는 것도 좋지만 그림을 더 많이 보도록 해라’, ‘신자가 되건 안 되건 성경을 읽어라’, ‘지금처럼 부지런히, 열심히 진솔한 시를 써라’… 선생님 댁에서 백양로까지 함께 걸으며 들려 주셨던 말씀들은 지금까지 내 시詩가 시궁창에 뿌리내리지 않도록 하는 귀한 지침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지금처럼 열심히 쓰면 곧 추천해 주마’하시던 말씀은 가슴 한켠에 담아놓은 채, 나는 곧 애들 아빠와 전쟁 같은 사랑에 빠졌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다.

그 무렵 찾아뵈었던 선생님께서는 언짢으신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이제 다시는 여자 제자들은 키우지 않으려고 해. 시가 좀 좋다고 얘기하면 당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 된 거마냥 으스대다가 가정에 파묻혀 감상적인 시나 좀 쓰다가 말지 않니? 그렇지만 남자애들은 달라. 처음엔 시가 형편없어서 호통을 치게 되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끈기 있게 열심히 쓰니 어느 날 문득 시가 좋아져 있거든.”

그때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웬걸. 그리고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한달음에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4. 시의 시궁창에 빠지다

- 내연의 관계, 시詩

 

선생님께 자신만만하게 말씀드렸던 것과는 달리 한동안은 시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시 쓰던 후배가 “이제 시는 안 써요?” 라고 물으면, “내 아들들이 지금은 내 시야.”라고 대답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내가 시를 떠난 적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곧 시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그렇게 지내는 사이 아무런 조건 없이 때론 다독이고, 때론 호통을 쳐 주시던 조순 선생님과 박두진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버리셨다.

물론 그 긴 시간 동안 시를 전혀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백일장에 가서 입상을 하기도 하고, 시 쓰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도 하고,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2년 연속 최종심에서 떨어져 보기도 했고, 동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부끄럽게도 그 긴 시간 동안 내 화두가 줄곧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가 아니라, ‘내 시의 울타리가 되어 줄 곳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였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촘촘한 그물 속에 인맥·나이·학연·성별·돈의 위력·등단지 이름에 짓눌리며 머리를 조아려 공들이지 않고도 내 시를 읽어 줄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헤매며 속앓이 하는 동안, 나는 쭈욱 시와 내연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와의 동거가 싫어 10년쯤 전에 용기를 내어 한 잡지사에 시를 보냈다. 그랬더니 등단을 축하한다며 연락이 왔다. 내로라하는 원로 시인인 발행인은 당선소감을 써서 들고 찾아간 내게 자신의 명함 뒤에 계좌번호를 적어주었다. 도대체 얼마를 입금시키라는 말인가. 머릿속에 수많은 벌이 윙윙대며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등단을 포기했다. 그리고 시집을 내는 것으로 등단을 대신하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를 애송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고급 애독자는 사라져버렸고, 시 생산자들과 시를 재생산하는 평론가만이 시를 읽는 시대가 되어버렸는데, 이런 상황에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때마다 어린 날의 스승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때 열심히 시를 쓰지 않았던 통한으로 뼈가 아렸다.

 

#5. 다시 시를 만나다

- 내 삶의 화두, 시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내 시를 편안하게 받아 줄 잡지를 만나 고맙게도 등단이라는 것을 하였다. 시를 처음 만난 후 40년 가까이 길을 헤맨 멍청한 내가 드디어 시인이라는 자격증을 받은 셈이다.

한편 허망하기도 하지만, 그 긴 습작 기간이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동안에도 나는 시를 읽고 썼으며 문단의 안팎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었으니, 복이라면 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좋은 시를 쓰는 훌륭한 시인들이 어떤 이들인지, 좋은 잡지가 어떤 것인지, 훌륭한 평론가가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지도 제법 가려볼 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참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뼛속에 새기며 허명虛名을 앞세워 부화뇌동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시의 대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며 수사법 역시 부단히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될 터이지만 내 시에 대한 주제는 ‘생명에 대한 외경’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단의 경계인境界人으로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결같이 내게 위로가 되어준 것은 동·식물들과, 풀꽃처럼 여린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힘닿는 한 그 고마움에 대한 작은 보답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갖가지 힘을 휘두르는 인간들의 폭력 아래 짓밟히면서도 제 향기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여린 목숨들이 내게는 그저 다 피붙이 같기만 하다. 아이들, 강아지, 길고양이, 사람의 먹잇감으로 쓰이기 위해 목숨을 가지게 된 것들과, 사람의 길에서 상처받고 스러지는 온갖 것들… 그것들을 눈이 시려 바라볼 수 없을 때까지 어디 한번 깊이 들여다볼 참이다. 이제 내 시가 그 고속화도로 위의 백구가 되어 나동그라지지 않도록 낯선 길 찾기를 계속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여전히 시는 내 삶의 화두다. 그리고 ‘시에게 어떤 새 옷을 입혀야 하나’가 끊임없이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선배 시인들 뒤에서 몸을 낮추고, 즐겁게 고통스런 숙제를 계속해야겠다. 행복하다.

 

1

자살을 할 수 있단다/개미도/힘센 놈이 귀찮게 굴면//개미의 자살 소식에 /콧날이 시큰하다//미물微物 개미에게도/첩첩산중 어둔 밤이/그리도 많이 있었다니

 

2

토마토를 자르니/연분홍 핏물이 고인다//찔러도 끄떡 않던/철갑 게도 칼을 대면/눈물이 흥건하다

3

 

나만 우는가 했더니/나만 울 줄 아는가 했더니//함께 울어/외롭지 않은/실낱 목숨//다 내 피붙이라니

                                                       - 졸시 「참회록」 전문

                                                                                                                                                      (우리시 제2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