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존경하는 H주간에게

운수재 2009. 5. 8. 04:48

 

 

 

존경하는 H 주간에게/                    임보

 

 

 

날씨가 매우 추워졌습니다.

H형,(형이라 호칭하는 것이 다감해서 좋군요) 건강은 괜찮은지 궁금합니다.

생각하니 그 동안 너무 소원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우이동 골짝에서 매일 소주나 홀짝이면서 지내고, 형은 형대로 매달 시지(詩誌)를 꾸려나가노라 분망하다 보니 서로 자리를 함께 하기가 쉽지 않았나 봅니다.

 

오늘날 잡지를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압니다.

잡지 중에서도 문예지, 문예지 가운데서도 특히 시전문지를 매달 만드는 고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를 읽는 독자들이 많지 않으니 잡지는 팔리지 않고, 광고를 줄 만한 기업체들도 거의 없다 보니 얼마나 난감한 일입니까?

그러니 이러한 시지를 운영하는 일은 어느 뜻 있는 독지가나 혹은 사회단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처럼 되지 않아서 시잡지들은 시에 대한 의욕을 가진 몇 사람들에 의해 겨우 연명해 가고 있는 실정이 아닙니까?

이처럼 열악한 여건 속에서 시지들이 간행되고 있으니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야기되는 줄 압니다.

대부분의 시잡지들은 게재된 작품의 고료를 지불하지 못합니다.

하기야 시인들의 과잉으로 발표지면이 부족하다 보니 다수의 시인들은 이러한 홀대를 감수하면서도 작품을 발표하지 못해 안달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잡지들은 후원회원들을 모집하여 지원을 받기도 하고, 함량미달의 신인들을 매달 등단시켜 재원을 충당키도 하는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문학상들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상 주변에 모여드는 무리들을 장악하기도 하고,

젊은 비평가들을 동원하여 특정 문인을 조명 부각해 줌으로 세도를 부리기도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문단 선거철이면 후보들의 문지방을 기웃거리면서 산하 문인들을 동원하여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암암리에 배타적 섹트를 형성하여 각종 이권에 문학적 권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세도를 부리는 잡지의 주간쯤 되면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지 않습니까?

 

H형, 내가 형을 존경하는 것은 이러한 문학 풍토 속에서도 형이 지닌 의연함 때문입니다.

형은 어려운 시절 한 시지의 주간을 맡아 십수 년 동안 운영해 오고 있지요.

형은 처음에 쓰러져 가는 한 시지를 일으켜 세우려고 꽤 괜찮은 직장도 그만두고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까?

보통 사람은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용단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어떤 욕심보다도 시에 대한 형의 간절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했기에 형은 평소에 그렇게 소중히 아끼던 골동품들을 처분해 가면서까지 시지를 이끌어 왔던 것이 아닙니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형은 필자들에게 고료를 지불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액수이기는 합니다만 이는 문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겠다는 형의 피나는 배려로 보입니다.

대신 형은 아무런 원고나 싣지 않았습니다. 주로 청탁에 의해 작품을 실었지요.

친분에 얽매어 흡족하지 못한 작품을 부득이 게재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적지 않은 곤욕도 많이 겪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신인 등용에도 얼마나 엄격했습니까? 일년에 겨우 몇 명으로 제한했습니다.

형은 애초에 문단 권력에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속마음은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패거리를 많이 만들어 이용하겠다는 불순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형은 아직 그 흔한 문학상들을 제정하여 문인들을 유혹하지도 않고, 문학 집단을 형성하여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형이 주간하는 잡지는 비록 골방 같은 작은 사무실에서 책상 하나 놓고 만들어집니다만 이제는 한국 제일의 권위를 지닌 시지로 자리잡았습니다.

형의 청렬(淸冽)한 선비정신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H형, 오늘 내가 모처럼 형에게 글을 쓰는 것은 새삼 형의 칭찬을 늘어놓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아니 칭찬보다는 오히려 형에게 한 가지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고자 해서입니다.

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시의 오늘을 비관적으로 진단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아직 시가 살아남아 있기는 하지만 시가 퇴락해 가고 있는 시기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시 없이도 이 세상이 잘 굴러간다면 크게 애석해 할 것도 없습니다만, 시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면 팔짱만 끼고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시가 경제적인 생산력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물질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현대인들에게 소외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는 예술의 역할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언어 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시문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는 이미 한 생애의 중요한 시기를 시를 위해 할애하고 있는 형의 삶이 웅변으로 반증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떻든 지금 우리는 한국의 현대시가 퇴락해 가고 있는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될 시기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나는 퇴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용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현대 한국시가 안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라고 이해해도 상관없습니다.

한국시는 지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와 산문의 경계도 모호하고 시(詩)와 비시(非詩)의 한계도 애매합니다.

한국의 현대시는 한시의 절구(絶句)나 서구의 소네트(sonnet) 같은 형식의 제약이 없다 보니 그만 자유방임의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시라는 이름으로 써 놓은 글은 시로 불러주어야 되는 판국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보다 쓰기 쉬운 글이 없는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시의 위의(威儀)가 실추되고, 독자들은 난삽한 현대시를 갈수록 외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급선무는 실추된 시의 위의를 다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형식의 제한도 없는 자유시 속에 어떻게 시의 위의를 담을 수 있겠습니까?

좀 막연한 감이 없지 않기는 합니다만 나는 이 문제를 ‘시정신’ 속에서 풀고자 합니다.

무릇 좋은 시는 고결한 시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집니다.

그렇다면 ‘고결한 시정신’이 무엇인가? 이를 천착하는 일이 시의 위의를 되살리는 길이라고 여겨집니다.

H형, 오늘 내가 형에게 부탁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 ‘고결한 시정신의 천착’에 관한 과제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시인들 각자의 과제입니다만, 개인들의 일로만 방치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개인들의 다양한 견해를 수렴하여 보편적인 틀을 세우는 일이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역대 한국의 고전적인 작품 속에 서려 있는 전통적인 시정신을 발굴해 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음은 현대 시인들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인 시정신들을 또한 탐색해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전통과 창조의 승화된 통합을 통해 바람직한 시정신을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한국시의 정체성을 수립하는 길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시의 앞길을 밝히는 지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H형, 이러한 과업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습니다.

작업의 양도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명한 기획과 선별과 판단이 요구되는 일이므로 혜안(慧眼)을 지닌 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분은 오직 형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형이 한번 십자가를 지시지요.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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