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김춘수 선생님께/ 임보
『현대시학』(2000.3.)의 「續蹇蹇錄抄」 잘 읽었습니다.
소생의 졸문에 대하여 치지도외(置之度外)하시지 않고 대답의 글을 보내주신 선생님의 배려에 우선 감사합니다.
1
두 번째 글에서도 선생님께서는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선생님의 논리전개에 문제가 없지 않음을 감히 지적하고자 합니다.
‘시는 예술(art)이다. 예술은 기술(craft)이라는 어원에 근거한다. 그러니 시는 기술이므로 인격과는 무관하다.’
선생님의 지론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이러한 삼단논법적 논리전개는 단순논리의 문제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 가닥만 선택하여 외곬으로 빠져나가는 오류를 범할 염려가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는 예술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아름답게만 쓰면 된다’ 이런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부분적으로는 타당할지 몰라도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현명한 결론을 도출해 내기는 어렵습니다.
선생님의 지론도 부분적으로는 타당합니다. 시에 기술적인 요소가 관여한다는 것을 소생이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기술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가 지닌 부분적인 특성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craft)만이 마치 시의 전부인 것처럼 재단하려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시는 예술이다’하는 말은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라는 말의 축약으로 이해해야 될 줄 압니다.
따라서 시예술에 대한 논의가 매체인 언어를 도외시하고 예술성만을 문제삼는 것은 온전치 못하다고 봅니다.
시는 물론 언어를 기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발신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담고 있는 이상 인격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2
한편 선생님께서는 『장자』의 매미잡이 우화를 예로 들어 교(巧)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老莊사상의 전통에서 보듯이 자연을 존중한다. 예술에서도 巧(기교)를 멀리하고 인격의 자연스런 발로를 취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장자의 매미잡이 우화에서처럼 변증법적 과정이 있다. 오랜 수련 끝에 매미가 매미잡이 채에 절로 와서 붙게 된다. 장자의 이 교훈은 교를 밖에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다. 교를 통하지 않고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선생님께서 거론하셨기에 저도 <達生>편의 그 우화를 다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공자의 이름을 빌어 소개하고 있는 이 우화의 앞부분은 선생님의 지적처럼 부단한 수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뒷부분에서 그 꼽추 매미잡이와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이 우화는 끝을 맺습니다.
“…나는 몸은 고목같이, 팔은 나뭇가지같이 움직이지 않고 있소. 천지는 넓고 크며 만물이 많으나 오직 매미밖에 모르니 꼿꼿이 서서 사방을 돌아보지 않고, 만물로 매미를 바꾸지 않으니 내가 매미를 놓칠 리가 있겠소?”
그러자 공자는 제자를 돌아보며 “뜻을 나누지 않으면 신에 엉긴다. 이는 꼽추 늙은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用志不分乃凝於神 其痀瘻丈人之謂乎)”하였다.
이 우화는 수련도 수련이지만 달인이 되려면 어떤 사물에 혼신의 정신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소생은 읽었습니다.
‘교를 통하지 않고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선생님의 해석은 비약이 아닌가 합니다.
차라리 ‘비록 교가 높더라도 정신의 수련이 없고서는 달인이 될 수 없다’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無爲之道’를 설파하고 있는 『莊子』에서 ‘人爲之巧’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로 보입니다.
아무튼 전통적인 동양적 시관에서는 선생님의 지적처럼 교를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가 봅니다.
졸박(拙樸)을 소중히 여겼던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동양의 시관만을 좇아 교(巧)를 무시하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3
또한 선생님께서는 시의 애매성의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피력하셨습니다.
논리나 지성으로는 정확하게 포착이 안 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시의 대상이다. 시는 원래 그런 대상을 위하여 생겨났다. 시는 그러니까 사물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정이다. 이 감각을 되살려주는 것이 시의 가장 요긴한 임무다.
말하자면 시적 소재의 조건을 애매성으로 한정하신 것 같습니다.
즉 애매성을 갖지 않는 사물은 시의 적절한 소재가 될 수 없다는 논리로도 이해됩니다.
그러나 대상이 지닌 애매성의 문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애매성은 대상의 속성이라기보다 대상을 바라다보는 주체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동일한 대상을 놓고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쉽게 궁구되지 않는 신비성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깊게 바라다보는 입장에서는 사물 모두가 다 애매성의 대상이 됩니다.
시인은 사물을 깊게 바라다보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들에게 시적 소재의 제한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편 사물이 환기하는 애매성만을 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편협합니다.
사물은 우리에게 다양한 정서와 이미지들을 환기시킵니다.
어떤 것은 명료한 기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강렬한 슬픔의 정서를 빚어내기도 합니다.
사물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오욕칠정의 모든 감정들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시적 소재에 제한을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전문적인 시인이라면 어떠한 소재가 주어져도 이를 시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런 시인은 선생님께서 소중히 생각하는 기능적인 재능을 충분히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4
선생님의 두 번째 글에서도 ‘시=기교’라는 생각과 ‘시의 특성=애매성’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가 지닌 부분적인 특성에 집착하신 것 같고 소생은 시를 좀더 포괄적인 입장에서 보고자 하는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대개의 시인들은 자기 나름의 고유한 시관이 있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유의 작품을 쓰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과 저 사이의 시에 관한 이러한 논의는 서로에게는 쉽게 용납이 안 되는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시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논의들이 우리 시를 살지게 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과의 논의를 통해서 가장 바람직한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01년 3월 일)
* 이 글은 김춘수 선생의 답신에 대한 재 반론으로 썼던 것인데, 원로와 계속 논쟁을 벌이는 일이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아 발표를 보류했던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