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소요(逍遙)/ 임보
공복의 아침,
지난밤 독주에 혹사당한 장을 달래기 위해
한 컵의 생수를 마신다
쪼르륵 내장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냉수의 맛
수 억만 개의 물의 분자들이 혈관을 타고
이윽고 체내에 침투해 들어가리라.
한때는 바다에 머물었다가
한때는 구름 속 떠돌이었다가
한때는 소나기 방울이었다가
한때는 수목의 혈관을 흐르다가
한때는 짐승의 내장을 적시다가
한때는 새의 분비물에 섞였다가
어쩌다 지하 깊숙이 스며들어
천만리 수맥으로 수 천 년 흐르다가
어느 날 문득 붙들려 지상에 끌려나온 너
플라스틱 병 속에 감금되어 참 멀리도 달려왔구나
이 아침 너와의 만남 참 묘연도 하다
그러나 내일이면 또 내 몸을 빠져나가
다시 얼마나 긴 무량 세월을
무궁 세상과 뭇 중생들의 몸속을 떠돌며
보시행을 멈추지 않을 것인가
참 아득도 하구나 그대의 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