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산방동동

비장후기

운수재 2010. 1. 17. 13:45

 

 

 

 

비장후기(裨將後記)                    임보

 

 

1

 

철쭉산에서 철쭉산에서

붉고도 매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은 자운영(紫雲英) 자운영 논배미를 휘돌아

밤꽃 냄새보다 짙은 향기로 물이 되었다.

그 물 위에 파란 앵두꽃잎이 하나

어깨를 떨며 떨어져 내려.....

열 다섯 세상은 문득

분홍이 되었다.

 

2

 

산과 들,

무겁고 무더운 초록이었다.

초록의 늪에 짓눌린 막사(幕舍)는

파편처럼 우리를 자꾸만 토(吐)해 냈고.....

군화(軍靴) 밖으로 삐져나온 젊음을 꾸겨 넣으면서

주말(週末)이면 순례(巡禮)를 떠났다.

우리들의 성지(聖地)--춘천댁(春川宅) 뒷마루에는

열일곱 놈들이 다 보고도 남을

잉어보다도 고운, 크고 큰 여신(女神)의 다리가

열려 있었다.

370원 육군(陸軍) 상병(上兵)의 봉급을 문틈으로 밀어 넣고

차례를 기다리면

우리는 드디어 초록을 탈출했다.

 

3

 

가을 도회(都會)는 황색(黃色).

우리가 불혹(不惑)을 앓듯

서울은 철골(鐵骨)들의 종양(腫瘍)으로 쓰러져 눕고.....

퇴근(退勤)길 흐르는 인파(人波) 속에서 가끔

젊은 깃발의 향수(鄕愁)에 젖을 때면

江을 넘었다.

 

삼림(森林)처럼 울창한 주촌(酒村) 한 구석에

빈 주머니로 서면

열사(熱砂)에 절은

예비미망인(豫備 未亡人)들이

우리를 나누어 사냥해 갔다.

 

새벽이면

깃 빠진 늙은 장끼가 되어

아파트의 창밖에 내던져지고

우리는 빈 포도 위에서

잃어 가는 영토(領土)를 향해

노란 울음을 묻었다.

 

 

* <진단시동인>들이 <배비장>이란 공동 테마를 놓고 작업했던 작품입니다.

 

 

 

 

 

 

 

 

'임보시집들 > 산방동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당리 전설  (0) 2010.01.29
서동 형님의 달  (0) 2010.01.27
산방동동  (0) 2010.01.15
정읍별사  (0) 2010.01.13
서문(책머리에)/ 정한모  (0) 201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