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후기(裨將後記) 임보
1
철쭉산에서 철쭉산에서
붉고도 매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은 자운영(紫雲英) 자운영 논배미를 휘돌아
밤꽃 냄새보다 짙은 향기로 물이 되었다.
그 물 위에 파란 앵두꽃잎이 하나
어깨를 떨며 떨어져 내려.....
열 다섯 세상은 문득
분홍이 되었다.
2
산과 들,
무겁고 무더운 초록이었다.
초록의 늪에 짓눌린 막사(幕舍)는
파편처럼 우리를 자꾸만 토(吐)해 냈고.....
군화(軍靴) 밖으로 삐져나온 젊음을 꾸겨 넣으면서
주말(週末)이면 순례(巡禮)를 떠났다.
우리들의 성지(聖地)--춘천댁(春川宅) 뒷마루에는
열일곱 놈들이 다 보고도 남을
잉어보다도 고운, 크고 큰 여신(女神)의 다리가
열려 있었다.
370원 육군(陸軍) 상병(上兵)의 봉급을 문틈으로 밀어 넣고
차례를 기다리면
우리는 드디어 초록을 탈출했다.
3
가을 도회(都會)는 황색(黃色).
우리가 불혹(不惑)을 앓듯
서울은 철골(鐵骨)들의 종양(腫瘍)으로 쓰러져 눕고.....
퇴근(退勤)길 흐르는 인파(人波) 속에서 가끔
젊은 깃발의 향수(鄕愁)에 젖을 때면
江을 넘었다.
삼림(森林)처럼 울창한 주촌(酒村) 한 구석에
빈 주머니로 서면
열사(熱砂)에 절은
예비미망인(豫備 未亡人)들이
우리를 나누어 사냥해 갔다.
새벽이면
깃 빠진 늙은 장끼가 되어
아파트의 창밖에 내던져지고
우리는 빈 포도 위에서
잃어 가는 영토(領土)를 향해
노란 울음을 묻었다.
* <진단시동인>들이 <배비장>이란 공동 테마를 놓고 작업했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