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깜깜한 세상

운수재 2010. 3. 7. 05:54

 

 

 

 

깜깜한 세상

                                                              임 보

 

 

 

우리가 더러는 식구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잊어먹듯

계절도 더러는 그들의 순서를 잠시 잊고 건너뛸 법도 한데

자연에겐 그런 일이 전혀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을 차례대로 정확히 굴려 가는 해에겐 건망증이 없다

그래서 농부들은 가을을 미리 생각하고 봄에 씨를 뿌리고

상인들은 겨울을 미리 내다보며 여름에 모피를 짠다

 

달이 하는 일도 거르는 적이 없다

조금과 사리를 따라 바다의 물을 끌었다 놓았다 한다

그래서 어부들은 달을 바라보면서 그물을 손질하고

여인들도 달빛의 그늘을 살피면서 달거리를 다스린다

 

그런데 사람들의 하는 일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주례 앞에서 엄숙히 한 백년가약도

백만 군중 앞에서 토해낸 정치 공약도

며칠을 못 버티고 무너지기 일쑤다

 

아니,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는 놈이 장땡인 세상

사기 협박 절도 강도 테러 폭파 전쟁

세상은 온통 오리무중 깜깜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규범과 법률

윤리와 도덕의 그물을 만들어 잡아보려 하지만

걸리는 것은 늘 피라미들뿐

대어는 언제나 태평성세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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