슘
임 보
태평양의 심해에 살던 신묘한 고동 하나가 내게 찾아왔다.
그 놈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의 고향 가까이 사는 열대의 원주민들은 그를 어떻게 부르는지, 어류 학자들이 붙인 학명이 무엇인지도 물론 알 수 없다. 아니 그들이 어떻게 부르든 나는 상관 않고 그놈에게 이름을 하나 달기로 한다. 호(號)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조의 한 묵객은 이백 몇 십 개의 자호를 즐겼거늘 내 그놈에게 호 하나 주기로서니 크게 건방질 것도 없다. '슘'이라고 명한다. 무슨 의미냐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놈의 형상과 빛깔과 감촉과…… 이러한 것들이 내 심상 속에 섬광처럼 돋아난 소리다. 문자다.
도자기보다 더 반짝이며 화사한 뿔고동
보석보다 더 무겁고 단단한 패각(貝殼)
수국의 요정들이 가지고 노는 주사위인가?
어승(魚僧)의 사리가 담긴 사리함 같기도 하다
물이 불을 이긴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물이 빚어낸 저 화신(化身)이 불이 구워낸 자기보다 눈부시다
아 답답도 해라 내 어눌한 혀로 그를 형용할 수 없음이,
차라리 빛의 힘을 빌어 한 컷 붙잡아 보이는 수밖에
슘 슘 슘
아마도 수궁의 밀서가 그 속에 담겼나 보다
내 아직 그를 열어 읽을 수 없으니
뭍[陸]과 물[海]의 수교가 또 그만큼 늦어지는 수밖에…….
(미네르바 2010.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