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속 세종대왕 가라사대
임 보
이게 뭐꼬?
세상에 상하가 있는 법인데
시대가 아무리 변했기로서니 이건 너무한 짓들 아닌가?
짐을 신하들과 함께 이 좁은 방 속에 밀어 넣는 거야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해서 참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도대체 이 방의 좌석 상하 질서가 뒤죽박죽 엉망이다
제자 율곡을 스승인 퇴계의 윗자리에 앉혀 놓다니
이것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법도란 말인가?
더군다나 대왕인 짐을 모시는 태도가 이게 뭔고?
느닷없이 내 옥좌의 위에 황금의 대좌를 새로 만들어
사임당인가 하는 여인을 끌어다가 앉힌 저의는 무엇인가?
한 아낙으로 하여금 제왕의 자리를 까뭉개려는 속셈인가?
그것도 사임당과 율곡의 모자 틈에 날 끼워 놓으니
이런 답답이 어디 있나?
어떤 놈은 퇴계와 내가 나들이를 제일 빈번히 해서
백성들에게 얼굴 많이 익혀 좋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퇴계나 내가 어디 얼굴 팔아 대선에라도 출마할 처지더냐?
요즈음 백성들이 나를 어찌 여기는지 그대들도 잘 알리라
시중의 장삼이사들이 사임당 대하기는 신주 모시듯 하면서
삼척동자들도 짐 여기기는 하인처럼 하니 이 무슨 봉변인가?
도대체 이처럼 질서를 교란케 하여
짐의 위의를 실추시킨 장본인이 어떤 놈이란 말인가?
하기사, 요즘 나는 동네북이다, 북!
내 이름의 거리, 내 이름의 연구소, 내 이름의 학교
머잖아 생긴다는 행정도시까지는 봐 준다손 치더라도
무슨 호텔이며, 공연장, 음식점, 헤어숍까지
강아지 이름처럼 ‘세종’을 끌어다 쓰고 있는 판국이니… 참,
4대강 개발이고 나발이고 가장 시급한 것은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아 실각한 짐의 권좌를 복권시키는 일이로다
거기 누구
혁명을 꿈꾸고 있는 충신 아직 없는가?
*2011년 대한민국의 지폐 단위 속의 초상
오만 원 권 : 신사임당(배경 : 포도화, 후면 : 매화와 대 그림)
만 원 권 : 세종대왕(배경 : 훈민정음과 일월도, 후면 : 혼천의(渾天儀))
오천 원 권 : 율곡 이이(배경 : 오죽헌과 대나무, 후면 : 신사임당의 초충도)
천 원 권 : 퇴계 이황(서원과 매화, 후면 : 도산서원 산수화)
퇴계와 율곡은 사제지간이고, 사임당과 율곡은 모자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