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몰래/ 임보
남 몰래 한 사람을 가지고 싶다
짙은 눈썹에 윤기 어린 탄탄한 갈색의 피부
스물 서넛쯤의 발랄한 숙녀
그녀를 종일 생각하며 꿈을 꾸고 싶다
세상의 명성이나 보석에 아직 물들지 않고
세상도 그녀를 아직 눈독 들이지 않아 자유로운,
골목길 어느 꽃가게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거나
혹은 어느 은행의 창구에서 바삐 손을 움직이거나
아니면, 어느 유치원 뜰에서 애들과 유희를 하고 있어도 좋으리
장미 한 송이만 주시겠어요?
네, 하며 꽃을 싸는, 셀로판지보다 더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
만 원만 예금해도 되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미소와 함께 울리는 그녀의 낭랑한 음성,
아이들의 춤을 구경해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즐겁게 구경하세요, 학부모님!
장미며, 예금이며, 춤이며
그것은 한갓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
마음을 감추고 지켜보는 시간은 얼마나 흐뭇할까?
예쁜 시가 담긴 편지를 가끔 써서
발신인도 밝히지 않은 채 우체통에 넣어 놓고
두근거리며 밤을 설치고 싶다
편지가 도착할 때쯤을 기다렸다가
남몰래 그녀를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고 싶다
차 한잔 함께 하실 수 있겠어요?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겠어요?
이런 속된 얘기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달래며
밤마다 쉬 잠들지 못하고 황홀한 내일을 꿈꾸리
내가 열일곱에 했던 그런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 혼자만 간직했던 그런 사랑을
다시 해 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