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상속자/ 임보
이 온대의 양기(陽期)
내 작은 정강이 사이로 미어져 나온,
거기 높게
선인장처럼 걸려 있는
교수(絞首)해 보고 싶도록 너무 자유로운
시간,
태양이 사탑(斜塔)모양
내 그림자를 업고 비척거리는……정오는
바다 가까이 녹색의 잔잔한 수림(樹林)들을 모아
나의 건강한 종교를 세운다.
지구는
둥근 식기(食器),
내 좁은 위(胃)와 장(腸)의 거리에 매달려
퍼덕거릴 때
신(神)은
다감(多感)한 계절들을 번갈아 보내
나의 이 오만한 식성(食性)을 달랜다.
회의(懷疑)는
앞서 간 자들이 민망스러워 머물던
나태(懶怠)의 낡은 다락일 뿐.
죽음도
언젠가 내 노래했던 부드러운 리본 가까운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내 마지막
가구(家具).
이 완전한 나의 풍요(豊饒),
이 완전한 나의 여가(餘暇),
예지(叡智)는
내 심장의 넓은 포단 위에 시장을 세우고
거미처럼 몸을 사린 채
이들의 체중을 거래한다.
나는 그저
한 개의 선험(先驗),
권능(權能)의 조용한 원심혈(圓心穴),
먼 천개(天蓋)의 유성(遊星)들도
가까운 이 거실(居室)의 천정(天井)도
여기서는 모두 같은 거리,
이제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내려앉는
안개인 것을,
밤이면
대지도 내 등에 와 가만히 머문
벌레인 것을,
나는 조용히 듣고 있다.
세계는
내 조부(祖父)가 지은
낮은 원두막(圓頭幕),
여기 나는
거만한 상속자.
[사족]
이 작품은 1962년 김현승 시인에 의해 <현대문학>지에 마지막 추천된 데뷔 작인데,
독선과 치기가 넘친 젊은 날의 초상을 보는 것 같아 심히 민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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