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선

거만한 상속자

운수재 2012. 2. 16. 08:04

 

 

거만한 상속자/      임보

 

 

이 온대의 양기(陽期)

내 작은 정강이 사이로 미어져 나온,

거기 높게

선인장처럼 걸려 있는

교수(絞首)해 보고 싶도록 너무 자유로운

시간,

 

태양이 사탑(斜塔)모양

내 그림자를 업고 비척거리는……정오는

바다 가까이 녹색의 잔잔한 수림(樹林)들을 모아

나의 건강한 종교를 세운다.

 

지구는

둥근 식기(食器),

내 좁은 위(胃)와 장(腸)의 거리에 매달려

퍼덕거릴 때

신(神)은

다감(多感)한 계절들을 번갈아 보내

나의 이 오만한 식성(食性)을 달랜다.

 

회의(懷疑)는

앞서 간 자들이 민망스러워 머물던

나태(懶怠)의 낡은 다락일 뿐.

죽음도

언젠가 내 노래했던 부드러운 리본 가까운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내 마지막

가구(家具).

 

이 완전한 나의 풍요(豊饒),

이 완전한 나의 여가(餘暇),

예지(叡智)는

내 심장의 넓은 포단 위에 시장을 세우고

거미처럼 몸을 사린 채

이들의 체중을 거래한다.

 

나는 그저

한 개의 선험(先驗),

권능(權能)의 조용한 원심혈(圓心穴),

먼 천개(天蓋)의 유성(遊星)들도

가까운 이 거실(居室)의 천정(天井)도

여기서는 모두 같은 거리,

 

이제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내려앉는

안개인 것을,

밤이면

대지도 내 등에 와 가만히 머문

벌레인 것을,

나는 조용히 듣고 있다.

 

       세계는

       내 조부(祖父)가 지은

       낮은 원두막(圓頭幕),

       여기 나는

       거만한 상속자.

 

 

 

[사족]

이 작품은 1962년 김현승 시인에 의해 <현대문학>지에 마지막 추천된 데뷔 작인데,

독선과 치기가 넘친 젊은 날의 초상을 보는 것 같아 심히 민망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