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초꽃을 보다가 - 임보(林步)
소심(素心)이 참 오랫만에 둬 송이 흰 꽃을 밀어올리기에
창가에 올려 두고 만지며 보았는데, 그 진한 향으로 종일
방을 흔들어 제법 시끄럽게 했다.
그렇게 하기를 한 열흘쯤 했을까 문득 어느 아침에 녀석의
목이 쉬어 있음을 보았다. 그 쉰 목소리가 창에 붙박힌
방충망에 걸려 찢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렇구나, 우리는 이제껏 갇혀 있었구나,
벌과 나비 그리고 새들의 즐거운 세상 저 천공의 자유로부터
유폐된 방, 우리는 포로였었구나.
그렇구나, 네가 뿌린 그 짙은 향은 절규였었구나,
옥중 춘향이 장탄가로 님을 목메어 부르다 쓰러지듯
너는 코를 저미여 그렇게 울다 목이 갈라져 이제 주저앉았구나.
오늘밤 잠이 들면, 네 짙은 울음이 묻힌 내 가슴속에서는
몇 마리 나비가 부화하여 천사처럼 그대에게 가겠구나,
가서 그대 젖은 눈을 닦는 님의 입술이 되고
그리고 드디어 꽃은 지겠구나.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운수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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