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道場 / 임보
시장 밑바닥에 굴러다니던 삼돌이란 놈이
세상이 시끄럽다고 큰 산을 찾았다
석파石波 스님이 된 삼돌이 그러나
절간도 소란스럽다고 암자에 나앉았다
하지만 암자의 목탁 소리도 번거로워
토굴을 파고 그 속에 홀로 묻혔다
토굴의 벽을 맞대고 열두 달은 지났는데도
천만 잡념이 꼬리를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구러 서너 해가 바뀌던 어느 여름날 밤
한 마리 모기에 물어뜯긴 석파, 문득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제 몸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토굴을 박차고 다시 시중으로 내려와
팔도 잡배들이 득실거리는 시장 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자신을 다스리기로 했다
조약돌을 닦는 것은 고요한 물이 아니라
거센 여울이 아니던가
수십 성상이 지나 석파의 머리도 세어졌다
어느 날 천둥이 그의 머리를 깨고 지나갔는데
세상을 내려다보니
모두가 다 부처요, 보살 아님이 없었다
- 임보 시집 < 눈부신 귀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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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가면 법당의 외벽에 벽화로 많이 그려져 있는
‘심우도(尋牛圖)’란 그림이 있다.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소를 찾아가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불화의 일종이다.
보통 열 단계의 장면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십우도
(十牛圖)’라 부르기도 한다.
심우도는 언어와 어떤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부처님이 가르친 말씀 밖의 의미를 되새겨 사람 마음의
실상을 찾아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과 원리로 삼은
그림이다.
처음 선을 닦게 된 동자가 본성에 비유되는 소를 찾기
위해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소를 발견하고
길들인 뒤에 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소에 대한 모든 것을 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속세로 나간다는 내용이다.
심우도는 소를 찾는 과정을 단순하게 그리고 있는
듯해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깊고 심오한 선종의 사상이 담겨있다.
도량을 찾아 떠난 ‘삼돌이’의 행로 역시 심우도에 비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자기 자신을 찾는 마음공부가 불교의 가르침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특히 고도의 산업정보화 사회인 현대에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자기 자신을 찾기보다 돈과 물질과 권력과 명예를 찾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상실의 시대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제 몸인 것’이다.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를 알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유마경엔 ‘곧은 마음이 곧 도량이다(直心是道場)’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도량이란 본래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아래의 장소를 뜻하는 말로 지금은
스님들이 수행하기 좋은 수행처를 일컫는다.
하지만 부처가 따로 없듯 도량이 따로 있지 않아 마음을
맑고 바르게 하면 그곳이 어디든 도량이라는 것.
‘팔도잡배들이 득실거리는 시장 바닥’ 저자거리일지라도
마음을 세차게 닦는다면 이르는 곳마다 좋은 도량
이라는 말씀.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을 어찌 먹느냐이다.
마음에다 도량을 지으면 그 마음으로 부처가 된다는 뜻.
그렇게 보면 부처와 보살 아닌 중생도 없는 것이다.
/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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