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축행(天竺行)/ 임보
―혜초(慧超)의 길
1
해는 돛대의 끝에서 화로를 쏟듯 이글거리고
배는 끓는 바다를 가르며 서(西)으로 미끄러지네
상어의 무리들은 물갈기를 번득이며 달려오고
갈매기 떼들은 긴 부리를 세우고 날아들도다
망망하고 망망한 물의 세상
이 물의 끝은 어디이며
이 물의 그릇은 무엇이란 말인가.
2
검은 구름의 떼는 비바람을 몰고 북(北)으로 몰려가고
거센 파도는 뱃전을 물어뜯으며 뭍으로 밀려가도다
부리가 검은 물새들은 부러진 돛대에 매달려 퍼덕이고
물에 젖은 수부(水夫)들은 돛줄에 감긴 채 쓰러져 있네
천의 용(龍)이 먹구름 속에서 번개를 토하고
만의 이무기가 바다를 뒤틀며 몸부림치는구나
예전엔 뭍이 넓고 험한 줄 여겼더니
이제 깨닫노니 수국(水國)의 크고 무서움이여,
달마(達磨)여, 한 가닥 갈댓잎으로 바다를 잠재운
그대의 맨발에 입술을 얹노니
그대가 왔던 길을 내게도 열어 주소서.
3
달과 별들도 제 길을 따라 흐르지만
이들을 끄는 고삐는 보이지 않고
구름의 갈기를 흔들며
때로는 모래 먼지를 허공에 띄워
사람의 발자국을 지우는
바람의 손도 잡을 길 없네
두고 온 산하(山河) 서라벌은 갈수록
아득하게 사라져 가는데
해가 드는 나라 서역(西域)
천축(天竺)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도다
약대여, 등이 굽은 내 친구여
내가 잡은 것은 네 고삐지만
너와 나 몇 겁의 거리로 서로 떨어져
외롭게 가고 있는가
이름 모를 새들은 구름 속으로 빨려들고
개미들도 분주히 모래의 구릉을 기는구나
지상(地上)의 모든 잎들은 햇살을 향해 반짝이고
설산(雪山)의 녹은 눈은 강을 이루어 대지를 적시네
만상(萬象)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이들을 몰고 가는 손
그 고삐는 잡을 길 없도다.
4
바람아, 바람아, 밤에 이는 더운 바람아!
낮의 일들은 그래도 내 눈으로 만질 수도 있고
손이 닿으면 그 손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밤의 세상은 참 답답도 하구나
두우(斗牛)의 누운 머리가 가는 행방을 밝혀 주기도 하고
달의 차고 기욺이 가는 때를 일러 주기도 하지만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밭 여기가 어디인지
발이 딛고 가는 곳은 늘 그곳이 그곳일 뿐
밤이 새도록 걸어도 별과 달을 따를 길 없네
밤의 수레에 함께 실려 가는 나의 친구들
종려수여, 목이 긴 약대여, 네 곁에 눕고 싶구나
나무는 서 있어도 쉬지 않고 가고
약대는 온종일 걸어도 종려수 그늘 밑이로세
치마를 다 적시며 강가에서 빨래하던 눈이 큰 여인
땅에 닿도록 휘늘어진 붉은 능금나무의 열매
지붕 위의 고양이들도 숨죽이던 푸른 비파의 가락
몸은 천의 밤낮을 넘어 만 리의 밖에 와 있어도
욕정은 도둑처럼 몰래 오던 길을 되돌아가
천지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것은
겨우 한 뼘의 수유(須臾)로구나
바람이여, 사막의 더운 바람이여
이 육신의 물기를 걷어가 다오
내 등 위에 만경(萬頃)의 사막을 일궈다오.
5
바람의 등에 업혀 허공을 메운 억만 모래의 무리들은
벌 떼보다 사납게 잉잉거리며 눈과 코를 물어뜯고
주저앉은 모래의 구릉들은 겹겹이 지친 발길을 막아서도다
작열하는 해는 종일 이마 위에 잉걸불을 내리쏟고
전갈들은 모래 속에 묻힌 병든 발꿈치를 쏘아대도다
목은 구들고래처럼 타 들어가고
입은 소태보다 쓰고 껄끄럽네
물이여, 한 방울의 물이여
대지를 가르며 흐르던 생명의 강물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천지를 온통 삼키던 대양의 노도(怒濤)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물이여, 한 방울의 물이여
가시나무[仙人掌]의 배를 갈라
그 쓴 수액에 혀를 적시며 쓰러지노니
찢어진 넝마의 살갗으로 스며드는 붉은 그림자
어디서 들려오는 늑대의 검은 울음소리
아, 물이로다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폭포
녹색의 울창한 수림(樹林)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천도(天桃)
선녀인가, 목욕하는 여인들의 저 은백의 살결
살진 사슴의 무리들도 반갑구나
가자, 어서 달려가자
그러나 몸은 만 근의 덫에 눌려
움직일 수 없구나.
6
눈을 뜨면 세상은 열리고
눈을 감으면 세상은 닫힌다고
그렇게 이르던 자 누구인가
이목구비(耳目口鼻)
저 오온(五蘊)의 문(門)이여
그것이 세상을 빚고
그것이 세상을 허무는구나
있고 없음은 밖에 있지 않고
시작과 끝도 다 안에 있거늘
내 무슨 망령의 미혹에 홀려
한 송이 매화에 가슴을 앗기고
한 과의 사리에 마음을 잃어
천의 밤낮을 그렇게 뒤챘단 말인가
내 무슨 미망의 헛된 꿈에 사로잡혀
부처의 땅을 밟겠다고
서방정토(西方淨土)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천만의 산하(山河)를 그렇게 넘었단 말인가.
7
그가 첫발을 디딘 가비라위(迦毘羅衛)의 하늘도 보았고
그가 마지막 떠난 구시나라(拘尸那羅)의 땅도 만졌다
녹야원(鹿野苑), 왕사성(王舍城)
그의 흔적이 어린 천축의 다섯 나라들을
발바닥이 헐고 헐도록 밟고 또 밟는다
서라벌의 산천이 그러한 것처럼
구름은 하늘 위를 그렇게 날고
강물은 낮은 곳을 따라 그렇게 흐르는구나
당나라의 초목군생들이 다 그러한 것처럼
수목들도 그렇게 지상에 솟고
짐승들도 그렇게 지상을 기는구나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더우면 벗고 추우면 입고
말은 다르나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로세
천축(天竺)이 당(唐)의 안에 있고
당이 계림(鷄林)의 밖에 있지 않으며
계림 또한 내 밖의 것이 아니거늘
마음이 곧 만상(萬象)의 집이로다
이제 보노니
이 소소한 높음이여
내가 서 있는 여기가 팔황(八荒)의 한 중심
나귀의 등
종려의 잎새
일렁이는 물
타오르는 불
곱고도 곱도다
만상이 다 불성(佛性)
이승이 곧 불토(佛土)로세
매인 자의 세상은 사바(娑婆)이나
풀린 자의 누리는 정토(淨土)로다
내가 걸으면 만유(萬有)가 내 발끝에 매달리고
내가 누우면 만고(萬古)가 내 등에 업히는도다
관자재(觀自在)
관자재(觀自在).
=====================================
* 임보의 잠언시집 [산상문답]에서
'임보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동 천렵 / 임보 (0) | 2017.06.16 |
---|---|
[스크랩] 원통쿠나, 사랑하는 아이들아! / 임보 (0) | 2017.04.07 |
[스크랩] 난경 / 임보 (0) | 2017.03.29 |
[스크랩] 마음 간수 / 임보 (0) | 2017.03.28 |
[스크랩] 오늘 / 임보 (0) | 2017.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