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수필

[스크랩] 취밭을 꿈꾸다 / 임보

운수재 2017. 6. 2. 09:31



취밭을 꿈꾸다

                                                                                   임 보

 

 

운수재의 뜰에서 40년 가까이 기르던 잣나무를 베어냈다.

이 집에 처음 이사 들었을 때는 성인의 키 정도밖에 안 된 어린놈이었는데 해마다 무럭무럭 컸다. 그놈 때문에 마당에 그늘이 너무 심해 몇 차례 가지를 치기는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무성해졌다. 드디어 몸통이 아름드리로 굵어지고 키가 지붕 위로 솟아 가지가 마당의 남쪽 하늘을 거의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뜰에 심어 놓은 백모란이며 산당화며 목백일홍은 물론 감나무 매화나무까지도 기를 못 펴게 되었다. 여름 한 철 상추며 고추를 심어 먹던 일도 그만 접어야 될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40년 지기의 저 잣나무를 아쉽지만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처음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논어)어쩌고 하면서 그놈의 기백을 높이 사며 사랑스러워 했었는데 안하무인으로 군림하게 되자 주인의 눈 밖에 난 것이다.

사람의 일도 저와 같은 경우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주인의 총애를 과신한 나머지 분수도 모르고 거들먹거리며 행패를 부리다가 철퇴를 맞고 주저앉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기고만장 위세를 떨치던 관료나 기업인이 하루아침에 쓰러지기도 한다.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사람이고 동·식물이고 간에 생명을 지닌 것들의 욕망은 절제하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막상 제거하려고 하니 자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무가 크다보니 트럭과 고가 사다리차가 동원되고 몇 사람의 인부가 달라붙어야만 했다. 그놈을 숙청하는데 기십만 원의 비용도 함께 날라갔다.

그런데 자르고 난 뒤 남아 있는 그루터기가 또한 나를 괴롭혔다. 그놈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했다. 몸통을 다 자르기가 좀 민망해 한 1미터쯤 남겨놓았는데 그놈이 내 심금을 언짢게 했다. 특히 전기톱날이 지나간 절단 부분에 시선이 가게 되면 마치 참수당한 신하의 잘린 목을 대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남기지 말고 아예 다 잘라낼 걸 하며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그루터기에 걸맞는 플라스틱 대야를 구해 그놈을 엎어 잘린 부분을 가렸다. 그랬더니 헬멧을 쓰고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놈처럼 어색해 보였다. 그래서 그 위에 수석 한 점을 올려놓았더니 좀 덩그렇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돌받침대가 되었다. 남한강 청풍 돌밭에서 모셔온 거북돌[龜石]이 우리집 뜰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앉았다. 돌이 나무를 누르는 바람에 잘린 잣나무에 대한 연민의 마음도 차차 누그러지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변고가 생겼다.

내가 살고 있는 운수재는 남향인데다 앞이 수백 평의 공지여서 햇볕이 잘 들었다. 그 공지에 4층짜리 빌라들이 들어서 우리집 앞을 막아섰다. 그래서 우리집 뜰이 단단한 콩크리트 그늘 속에 묻히고 말았다. 마당에 푸성귀를 더 이상 기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모란이며 산당화 목백일홍 들이 다시 몸살을 앓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될 걸 미리 예상했더라면 차라리 그 잣나무를 베어내지 말고 더불어 살 걸 그랬구나 하는 후회가 일기도 했다.

 

이른봄 날씨가 풀리자 낙엽들을 치울까 하고 뜰에 내려가 보았더니 낙엽들 사이에 파릇파릇 돋아난 잎새들이 내 시선을 끌었다. 보아하니 봄을 맞아 새로 돋아난 잎들이 아니라 낙엽 속에 묻혀 겨울을 이겨낸 묵은 취들이다. 지방에 거주하는 한 문우가 작년에 운수재를 찾아오면서 울릉도취라고 몇 그루 가져왔기에 백모란 곁에 심어 두었던 것인데 뿌리를 많이 뻗은 것 같다. 취는 그늘 밑에서도 비교적 잘 자란 식물로 보인다. 옳지, 이 녀석들을 잘 길러 뜰을 아예 취밭으로 만든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년 내내 싱그러운 취들로 푸른 뜰을 간직하면서 그 잎들을 뜯어 향긋한 나물을 만들어 먹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 문우가 내 뜰에 그늘이 질 걸 미리 예상하고 삭막한 내 마음을 달래라고 취를 가져다 주고 간 것만 같다.

 

(에세이21 2017 여름호)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운수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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