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꽃
임 보
‘헛’은 ‘속이 빈’‘실속이 없는’혹은 ‘거짓’등의 뜻을 담고 있는 접두사다. ‘헛소리’는 실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이고, ‘헛걸음’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헛수고만 한 걸음이다. 안동지방에 가면 음식점에서 ‘헛제삿밥’을 팔기도 하는데, 이는 제사 음식처럼 여러 나물과 함께 깨소금, 간장 따위를 넣어서 비벼 먹는 비빔밥이다. 말하자면 가짜 제사 음식이란 뜻이렷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뒤지다 ‘헛꽃’이란 말을 만났다. 생화(生花)의 상대적인 말― 조화(造花) 즉 가화(假花)를 이름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꽃이 아니면서 꽃의 흉내를 내고 있는 식물의 한 부분을 그렇게 명명했다.
꽃은 식물이 씨를 만드는 생식기관이다. 생명체가 자손을 생산하는 본능, 아니 천리(天理)가 암수 양성이 결합해서 후손을 만들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몸 속에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실로 놀라운 조상들의 피가 응집되어 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양성의 결합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장치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를 세계성 확장이라고 보는데 이것이 곧 진화의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생명체의 세계성 확장을 위한 조물주의 장치를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앞에서 거론한 양성의 결합에 의한 생식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식성(食性)이다. 즉 먹어야 살도록 되어 있는 본능이다. 먹는 행위는 무엇인가? 이는 객체의 주체화, 곧 사물(세계)의 자아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역시 생명체 속의 세계성 확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다시 식물의 생식 문제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동물인 경우는 양성(兩性)의 결합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 경우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대체로 식물은 수술에 화분(花粉)을 만들어 다른 식물의 암술에 옮기어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식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화분을 옮길 수 없으므로 바람이나 물이나 곤충 등의 힘을 빌게 된다. 곤충에 의존하는 식물들은 곤충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모색한다. 아름다운 빛깔의 꽃을 피워 곤충들의 시선을 자극하고,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여 곤충들의 후각을 자극하여 꽃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곤 달콤한 꿀을 제공해 주면서 곤충의 몸에 화분을 묻혀 다른 꽃에 옮겨 수분(受粉)이 되도록 한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식물이 어떻게 곤충들이 좋아하는 빛깔과 향기와 맛을 알아 그렇게 꽃을 피우는지 참 신통하기 그지없다. 비록 우리와 같은 이목구비는 없지만 식물은 어쩌면 주위의 사정을 훤히 다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 물정 모른다고 생각해서 식물을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헛꽃’은 식물이 원래 타고난 자신의 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덧보태 과장되게 리모델링을 해서 꽃처럼 보이도록 한 부분이다. 어떤 식물은 작은 꽃받침을 크게 키워 꽃잎처럼 두드러지게 보이게도 하고, 또 어떤 식물은 미미한 꽃 주변의 푸른 잎을 붉게 물들여 꽃잎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한다. 인간들이 타고난 자신의 몸매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형수술을 한 것과 유사한 행위라고나 할까?
나는 식물의 ‘헛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만들어 보았다.
헛꽃은 씨를 만드는 진짜 꽃이 아니라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는 바람잡이 꽃이다
산딸나무꽃의 눈부시게 하얀 부분은
꽃받침이 변해서 꽃잎처럼 보인 것이고
포인세티아의 화사하게 붉은 부분은
푸른 잎이 변해서 꽃잎처럼 흉내낸 가짜다
그놈들도 참, 처음부터 그런 꽃을 피울 일이지
꽃이 아닌 부분을 꽃잎처럼 위장해 허세를 부리다니!
경제성, 효율성을 생각해서 그리한 것인가?
그놈들의 헛꽃이 한동안 마음에 걸려 개운찮았는데…
오늘 아침 문득 사람들이 피운 헛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여인들이 곱게 치장한 연지며 곤지
갑사댕기에 연분홍 치마가 다 헛꽃이 아닌가!
― 졸시 「허꽃」전문
지상에서 헛꽃을 가장 많이 피우고 있는 존재가 어쩌면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엣세이 21, 201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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