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님들 2
네 번째 스승은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시인이시다.
내가 다형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광주의 한 신문사가 주관한 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내 시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때의 심사위원이 조선대학교 교수였던 다형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광주 양림동에 자리한 다형 댁엘 가끔 드나들었다.
시에 대한 말씀을 기대하면서 찾아갔지만 선생님은 별로 말씀이 없었다.
마른 볼에 유난히 큰 귀가 마치 선량한 사슴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말 주변이 없었던 터라 한동안 멍청히 앉아 있다가 그만 물러나오곤 했다.
내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1958년 무렵, 다형도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옮겨오면서 수색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20여 평의 조그만 반양옥집이었는데 다형의 조촐한 방엔 손수 끓인 원두커피의 향기가 늘 가득했다.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지만 술과 담배를 전혀 가까이하지 않는 청교도적인 청정한 삶을 살았던 분이다.
다형의 성품은 대쪽같이 강직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함부로 그분을 대하질 못했다.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59년 10월에 다형께서는 나의 「자화상」을 《현대문학》에 처음으로 추천해 주셨다.
두 번째 추천작 「거만한 상속자」는 1961년 11월에 그리고 마지막 추천작 「나의 독재」는 1962년 7월에 통과될 수 있었다.
세 번의 추천을 거치는데 3년 가까이 소요된 셈이다.
가을/ 볕바른 다실(茶室)에 앉으면/
차(茶), 그 투명의 향기에/ 부활하는 다형(茶兄).//
고독,/ 그 마른 정결로/ 뭉친 이마,/
늘/ 천상의 음계를 더듬어/ 크게 열려 있던/ 사슴의 귀,//
다만/ 한 잔의 뜨거운 커피에만/ 관용턴 입술,//
세상을/ 굳은 눈썹으로/ 재고 갔던/ 청교도,//
홀로/ 곧게 걷던/ 금강석의/ 시인.
―「다형(茶兄)」『목마일기(木馬日記)』(1987)
다섯 번째의 스승은 대학의 은사님들이다.
대학에 들어와 보니 네 분의 교수들이 계셨다. 일석(一石 李熙昇)과 심악(心岳 李崇寧) 그리고 백영(白影 鄭炳昱)과 백사(白史 全光鏞)였다.
그런데 어학 파트의 두 원로 교수가 주도를 하고 있어서 문학 쪽은 힘을 못 쓰고 있었다.
더욱이 이숭녕 교수는 창작에 뜻을 두고 있는 학생들을 불량배 취급을 했다.
그분의 말씀은 문리과대학은 학문하는 학자를 양성하는 곳이지 작가를 기르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학과의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글 쓰는 데 관심을 가지고 들어왔던 학생들도 생각을 바꾸어 어학이나 국문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20명의 입학 동기 가운데 창작의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틴 학생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의붓자식처럼 외톨이로 굴러다녔다.
소설을 쓰신 전광용 교수가 그나마 나를 다독여 주셨다.
그래서 그랬든지 대학에 들어온 후로는 시보다 소설 쪽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61년 대학신문에 단편소설 「비(碑)」가 당선되기는 했지만 신춘문예의 관문을 뚫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의 목청은/ 겨울 청댓잎 스치는 바람으로/ 늘 살아 있었다.//
남해(南海) 먼 바다 흑산도(黑山島)를/ 마흔 나이에/
등으로 져 끌어올리더니//
숨은 국초(菊初)의 멱살을 붙들어/ 세상의 밝은 햇볕에/ 올려놓았다.//
예술과 학문을 함께 메고/ 이 땅의 청사(靑史) 새롭히겠다고/
천하(天下)를 갈던 백사(白史),/ 욕심 많은 북청(北靑)분네.//
오늘/ 고희(古稀)에 앉아서도/ 그 푸른 목소리로/ 청댓잎을 흔들고 있다.
―「백사시(白史詩」전문 『은수달 사냥』(1988)
그리고 내 마지막 스승은 운정(芸丁) 정완섭(鄭完燮) 선생이시다.
이당(以堂)의 문하인데 내가 학원의 강사로 인사동에서 떠돌고 있을 때, 가끔 이분의 화실에서 문인화의 운필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일찍 세상을 뜨시어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내게 묵향의 운치를 일깨워준 분이다.
내 안방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얻은 운정의 그림이 걸려 있다.
삼베에 그린 두 폭의 금강산도인데 바라볼 때마다 과묵하고 온건한 그분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이켜 보면 나는 훌륭한 스승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아무도 안 계신 지금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그분들 생전에 좀 더 응석을 왜 못 부렸던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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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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