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헌(春雪軒) / 임보
춘설헌(春雪軒) 큰 주인은 어디를 가고
춘설헌(春雪軒) 빈집엔 바람만 가득
입춘절(立春節) 무등산 저녁 차밭엔
춘설차(春雪茶)만 춘설(春雪) 속에 타고 있어요
춘설헌은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계곡 삼나무 숲 속에 자리한
20여 평의 낡은 고옥(古屋)이다.
남화(南畵)의 거장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옹이 56세 이후
30년 가까이 살면서 서화(書畵)와 다도(茶道)를 즐기던 곳인데
지금은 빈집으로 쓸쓸히 남아 있다.
나는 지난 2월에 광주에 갔다가 이 춘설헌을 보고자 증심사 골짝을 더듬어 올랐다.
의재가 그의 만년을 자연 속에 은거하여 지내면서
의도인(毅道人)으로서의 졸박탈속(拙朴脫俗)한 예술 세계를 펼치던 곳이어서
진작부터 한번 보고자 별렀는데 뒤늦게야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의재는 1891년에 전남 진도(珍島)의 쌍정리에서 허경언(許京彦)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진도는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癡) 허유(許維)(1809∼1892)의 고장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어려서부터 서화에 관심을 보여
조항(祖行)인 미산(米山)(허유의 아들)으로부터 사군자 등 묵화와 서법을 익히게 된다.
그런 한편 무고(誣告)로 진도에 유배 중이던 대석학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의 문하에 들어 한학을 배운다.
그의 아호 '毅齋(의재)'는 스승인 무정이 내려준 것인데
논어의 '剛毅木訥近仁'의 구절 가운데서 취한 것이라고 전한다.
강의(剛毅)는 강직하여 굴하지 아니함을, 목눌(木訥)은 순박하고 말재주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의재의 순박·어눌한 성품을 간접적으로 기리는 뜻을 담았는데,
이 아호 때문이었을까 글자 그대로의 강직한 성품을 또한 지니게도 된다.
그는 스승인 미산을 거슬러 소치에 닿고, 소치를 다시 거슬러 추사(秋史)에 이른다.
그리고 원말(元末)의 4대가 황공망(黃公望), 오진(吳鎭), 예찬(倪瓚), 왕몽(王蒙)을 섭렵하며
청고절속(淸高絶俗)한 정신과 문기(文氣)를 익힌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가 소실취운(小室翠雲), 천합옥당(川合玉堂), 부강철재(富岡鐵齋) 등의 화풍을 접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넓혀 간다.
1922년 그는 선전(鮮展)에 출품하여 최고상을 획득하면서 30대 초에 일약 유명해진다.
당시의 화단도 서양의 풍조에 휩쓸려 서양화로 기울고 있었는데도 의재는 동양화를 고집했다.
동양화 가운데서도 남화에 매달렸다.
사실(寫實)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문인화의 정통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가 이름을 얻자 친지들이 서울에 자리잡기를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서울이라는 번잡한 도시가 그의 성정에는 맞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는 광주에 거처를 정했지만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50대 중반에 무등산 골짝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현실도피가 아니라 친자연의 도가적 삶의 시작이었다.
그는 애천(愛天)·애토(愛土)·애린(愛隣)의 삼애(三愛) 사상을 지닌 철인이기도 했다.
1938년에는 <연진회(鍊眞會)>를 만들어 시(詩)·서(書)·화(畵)를 익히며 인품을 닦는 도량을 열기도 했으며,
광복 직후에는 <삼애학원>을 건립하여 농촌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그 삼애학원이 뒤에 농업고등기술학교로 발전한다.
그는 무등산록에 차밭을 일구어 다도를 보급하기도 했다.
민족혼의 기틀을 새롭게 하고자 1969년에는 무등산 천제당(天祭堂) 빈터에 단군신전을 세우기도 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경향 각지에 걸쳐 수십회의 작품전을 통해 얻은 적지 않은 수입들은 이러한 사회활동에 다 쓰여졌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뜻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뜻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능력이 없어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뜻있는 일인 줄 알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곧 강의(剛毅)로운 사람이다.
의재는 바로 이런 강의로운 선비이기도 했다.
그는 이순(耳順)에 이르러 스스로 아호를 의도인(毅道人)으로 칭하게 된다.
청담한 설채(設彩)와 갈필(渴筆)의 조화는 가히 신운(神韻)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들 말한다.
그에 의해 한국 남화의 정통은 새롭게 자리잡은 것이다.
주말의 무등산 골짝은 산을 찾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다.
등산객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술집들이 증심사의 바로 턱 밑까지 몰려들어와 있다.
절의 목탁과 풍경소리는 들리지 않고 취객들의 가무와 고기 타는 냄새만이 깊은 계곡에 가득하다.
만약 의재가 오늘에 다시 살아난다면 이 골짝을 박차고 멀리 도망칠 것만 같다.
증심사 바로 밑 개울을 건너 삼나무 숲 언덕에 춘설헌은 자리잡고 있다.
주인을 잃은 지 어언 20여 년이 지난 이 집은 이제 창문도 떨어져나간 채 바람의 집이 되어 있다.
현관의 문지방 위에는 의재가 손수 쓴 춘설헌 현판이 아직 그대로 걸려 있다.
때마침 춘설이 분분히 내리는 속에 옛 주인의 손때가 묻었음직한 매화 한 그루를 본다.
춘설헌 맞은 편에는 의재미술관이 공사 중인데 솟아오른 시멘트 건물이 어쩐지 마음에 거슬린다.
춘설헌 위쪽 산등성에 의재의 묘소가 있다기에 비탈길을 미끄러지며 허덕허덕 기어오른다.
쌓인 봄눈 속에 찻잎이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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