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시(寒山詩) / 임보
밝은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다보면
세상은 참 꼴불견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아무리 삶의 원리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는 하지만
권모술수(權謀術數)에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인간들의 작태를 보면
절망적인 자괴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정의(正義)나 선(善)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과 간교한 음모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정의를 내세운 사람들은 이러한 세태를 부조리로 보고
이를 바로잡겠다고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한편 지혜로운 이들은 이러한 세태를 치욕(恥辱)으로 여기어
아예 이를 등지고 돌아서기도 한다.
전자의 과격한 행위를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적극적 행위를 우리는 은둔(隱遁)이라고 말한다.
은둔에도 진은(眞隱)과
가은(假隱) 두 부류가 있다.
전자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무욕청정의 상태로 돌아가 자연 속에 완전히 숨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전원에 돌아가 일시 세속적인 활동을 멈추고는 있으나
새로운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칭병(稱病)이나 칭친(稱親)을 하고 잠시 환로(宦路)의 길에서 벗어나
환향(還鄕)했던 조선조의 선비들은 대개 가은의 부류에 속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의 자세인가는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지만,
무욕청정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가장 수준 높은 삶의 반열에 '진은'을 내세울 만도
하다.
『한산시(寒山詩)』는 한산자(寒山子)라는 은자가
천태산(天台山)의 바위나 나무 그리고 촌가의 벽 등에 써 놓은 시들을
국청사(國淸寺)의 승려가 수집하여 엮은 시집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한산시』에는 한산자의 작으로 전해지는 300여 수의 작품 외에
습득(拾得)의 작품 50여 수 그리고 풍간(豊干)의 작품 2수도 끼어 있다.
그래서 『삼은시집(三隱詩集)』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습득과 풍간이 한산과 별개의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한산시』의 첫머리에
여구윤(閭丘胤)이라는 이름으로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가 실려 있는데
그 글에는 한산자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신비롭게 소개하고 있다.
한산은 자작나무 껍질을 머리에 쓰고
너덜너덜 헤진 옷을 입고
나막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
그는 한암(寒巖)이라는 석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가끔 국청사에 찾아와 부엌일을 하고 있는
습득(拾得)으로부터
음식 찌꺼기를 얻어 가곤 했다.
절의 중들에게 놀림감이 되어 욕설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매질을 당해 쫓겨나기도 했지만
한산은 손뼉을 치고 껄껄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
한산과 습득은 문수·보현보살의 화신이고
풍간(豊干)은 호랑이[山神]의 화신이다.
―「한산자시집서」부분
그러나 이는 시집의 편찬자가 저자를 신비롭게 미화하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산자가 어떤 인물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작품 속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시에 조예가 깊었던 중당(中唐) 무렵의 선비로 추정된다.
세속의 명리에 환멸을 느끼고 자연 속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굽어보고 살았던
진은(眞隱)이었던 것 같다.
그는 불가(佛家)에 가까운 길을 걸으면서도
승려로서의 틀에 박힌 규범적인 삶은 살지 않았다.
유가(儒家)와 도가적(道家的)인 요소도 적잖이 지니고 있었던
무애(無碍)·불기(弗羈)의 자유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산의 시 한
수를 읽어보면서 우리의 어지러운 마음을 잠시 맑혀 보도록 하자.
人問寒山道
寒山路不通 夏天氷未釋 日出霧朦朧 似我他由屆 與君心不同 君心若似我 還得到其中
사람이 있어 한산 길을
묻는구나/
그러나 한산 길에는 길이 통하지
않네/ 한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고/
해는 떠올라도 안개만 자욱하네/ 나
같으면 어떻게고 갈 수 있지만/
내 마음 그대 마음 같지가
않네/ 만일 그대 마음이 내 마음과 같다면/
어느 덧 그 산 속에 이르리라. (김달진
역)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한산 길'이란
어떤 구체적인 지역에 이르는 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속세를 절한 고고한 의경(意境)―곧 청정한 마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니 그곳에 이르는 물리적인 길이 있을 리 없다.
시인은 그러한 의경을 한여름에도 얼음에 싸여 있고
한낮에도 몽롱한 안개 속에 묻혀 있는 신비로운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속적인 욕망을 떨쳐버리고 살아가는 도인의 길이니,
일상의 세계와는 180도로 다른 경이로운 세상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러나 화자는 그대의 마음이 만일 나와 같다면
그러한 세상(유토피아)에 쉽게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화자와 같은 마음이란 무욕청정의 경지를 말함이니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러니 범상인에게는 '한산의 길'이 늘 도달하기 어려운 난경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산시』는 국경을 초월하여 많은 시인과 선비들에게 즐겨 읽히면서
마음의 때를 씻는 청량제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우리도 이 청량한 계절에 등불을 돋우고
한산의 맑은 시정에 잠시 젖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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