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성성자

운수재 2007. 3. 16. 09:40


 


성성자(惺惺子)  /    임보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같은 해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유학자다.

퇴계는 소백산하 안동(安東)을, 남명은 지리산하 삼가(三嘉)를 향리로 태어났다.

이들은 거의 평생 동안 고토(故土)를 멀리 떠나지 않고 은거해 지내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들의 거처가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졌기에 그들의 문하를 강좌학파(江左學派)·강우학파(江右學派)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들이 바로 기호학파에 맞서는 영남학파의 두 주류가 된다.

남명은 중종, 명종, 선조 세 임금에 걸쳐 10여 차례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출사(出仕)에 뜻을 두지 않았다.

마지못해 나간 적이 있더라도 이내 곧 물러나고 말았다.

사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쟁이나 일삼는 부패한 벼슬아치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그는 목숨을 아깝게 생각지 않고 임금께 매서운 상소를 올린 기개로운 선비이기도 했다.

1555년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은 물론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비 문정왕후와 국왕 명종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 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

라는 과격한 직언으로 주위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퇴계의 학문이 형이상학적인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기운데 반하여 남명은 수기치인(修己治人)·실천궁행(實踐躬行)을 중히 여겼다.

그는 왜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평소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는데, 그의 사후 23년 만에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 그의 많은 제자들은 도처에서 의병장 혹은 창의지사(倡義之士)로 궐기하여 싸웠으니 김명, 곽재우, 정의홍 같은 이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분들이다.

평소 남명은 한 개의 장도(粧刀)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그가 지닌 장도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명문(名文)이 새겨져 있었다.

직역하면 '내 안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내 밖을 처단하는 것은 의다'라고 옮길 수 있으리라.

 '경(敬)'과 '의(義)'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은 '받듦'과 '삼감'의 자세를 뜻한다. 타인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

남명은 이 '경'으로 자신의 내부를 늘 밝히면서 근신하고 지냈던 것이다.

한편 '의(義)'는 '옳음'이니 정의로움을 향하는 정신이다.

그는 외부의 여러 정황들을 의로운 정신으로 판단하고자 했다.

의롭지 못한 것은 칼로 자르듯 베어내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패용하고 다녔던 장도는 자신을 경계하고 지키는 무기였던 것이다.

그 칼은 '경'과 '의'에 혹 소홀해질지도 모르는 자신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준열한 결의의 상징물이다.

실로 등골을 오싹케 하는 매서운 선비의 기상을 엿보게 한다.

또한 남명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그의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

그는 그 방울의 이름을 '성성자(惺惺子)'로 명명했다.

 '성(惺)'은 '깨달음'이니 '성성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성성자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영롱한 소리로 울렸으리라.

그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남명은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나는 '경'과 '의'를 떠나 있지는 않는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장소가 혹 '경'과 '의'로부터 먼 곳은 아닌가?

이러한 자기검열, 자아반성의 구도자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만 매달면 혹 울리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을 염려하여 두 개를 매달았던 것인가?

그처럼 자기 성찰에 철저했던 선비를 선인으로 둔 후대의 우리들은 자신을 돌이켜보매 너무 부끄럽기만 하다.

남명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거유인데 그 동안 퇴계만큼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은 퇴계처럼 방대한 저술을 남겨 놓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그는 저술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실천에 옮기는 일을 소중히 생각했다)

그의 제자들이 퇴계의 제자들처럼 실세의 자리에 나아가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명의 인품이 출사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의 제자들 역시 벼슬길에 연연해 했을 리 없지 않았겠는가.

그의 탄생 500주년을 맞아 뒤늦게나마 남명학회가 결성되어 그의 학문과 사상을 본격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케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남명의 그 절조로운 선비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이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의 청량제로 삼았으면 싶다.

오늘의 정치하는 분들이나 관리들이나 기업하는 이들에게 쇠방울을 하나씩 매달고 다니도록 했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울리는 그 방울소리를 들으면서 하루에 몇 차례나마 자신의 행동거지를 반성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말이다.

설마 그 방울을 울리면서 권모술수를 꿈꾸거나, 의롭지 못한 곳에 떳떳이 드나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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