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엄살의 시학

운수재 2007. 3. 31. 11:16

♧ 작품 <일자(一字)> 해설


엄살의 시학(詩學) /   임보



1

나는 이번 학기 종강을 하면서 시는 '엄살부리기'라고 마무리를 지었다.

2

굳이 신화론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옛 노래들의 뿌리가 고대 제의(祭儀)에 닿아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전문적 시인은 사제(司祭) 곧 샤만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신을 향해 내쏟는 소망―기원(祈願)이 곧 시의 출발이다.
기원 그것은 신에게 부리는 인간의 엄살이다.
인간만큼 엄살스런 동물은 없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 줄을 안다.
지상의 어떤 동물의 새끼들도 인간의 그것처럼 울거나 웃지 않는다.
인간의 그 엄살기가 시를 키워 왔는지 모른다.
시뿐만이 아니라 예술 전반의 바탕이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가 싶다.
노래를 옛 사람들은 '영언(永言)'이라 했는데, 이는 말을 길게 늘인 것 곧 과장스럽게 표현돤 엄살스런 말이란 의미가 아니겠는가.
시는 뜻의 엄살이요, 노래는 소리의 엄살인 셈이다.

3

언어 발생의 원초적 요인은 무엇인가.
욕망 표출의 수단이 아니었겠는가.
인간의 모든 언어 행위는 욕망 표출에 근거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인간 엄살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로 표기된 것 가운데서도 가장 엄살스런 글이 시, 특히 서정시다.
시의 특성을 일러 '낯설게 하기'니 '의사진술(擬似陳述)'이니, '역설(逆說)'이니 하는 것들이 다 '엄살부리기'로 수렴될 수 있다.

4

나는 요즈음 허무맹랑한 꿈속에 젖어 산다.
선경(仙境)에 대한 꿈―그야말로 백일몽이다.
이 지상이 낙원이 아닌 이상 유토피아를 향한 이러한 몽상은 언제나 있어 왔다.
종교는 그 꿈이 믿음으로 정착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 조상들이 노닐었던 그 선(仙)의 세계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하면서 '구름 위의 다락마을'이라고 하는 연작에 들어갔다.
이름하여 '선시(仙詩)'라고 불러 본다.
<일자一字>는 이 연작 중의 한 작품이다.

    목계(木溪)라는 자를 만나 며칠 동행할 때의 일이다.
    월천(月川) 강가에 이르러 잠시 쉬는데
    절벽에 한 자 남짓한 길이의 "―"자가 새겨져 있다.
    목계(木溪)의 얘기론
    여러 천 년 전에 지나던 초공(草公)의 글이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고 물으니
    제대로 다 들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흐르는 물이 끝이 없어 산천이 늘 푸르다"
    라고 일러 준다.
    다시 한나절을 더 간 뒤 화구(火口)라는 골짜기에서 쉬는 데
    또한 그 골짝의 절벽에도 一자(字) 한 획이 새겨져 있다.
    이번엔 내가 초공(草公)의 글씨를 또 보는구나 했더니
    이건 초공(草公)이 아니라 모공(毛公)의 것이라며
    "타는 불이 그칠 줄 모르니 하늘이 늘 붉다"
    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같은 一자인데 어찌 그리 뜻이 다르단 말 인가.
    내 마음의 낌새를 알아낸 목계(木溪)는 껄걸 웃으며
    같은 사람도 한번 그은 획을 다시 그렇게 할 수 없거 늘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만든 그것들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작대기 획 하나로도 천 년을 오르내리면서
    서로 긴 얘기들을 그렇게 나눈단 말인가.
    초(草)와 모(毛 )중 누가 앞엣분인가 물으니
    글의 내용으로 보아
    누가 누구의 것을 화답했는지 자기도 가리기 어렵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내가 꿈꾼 것은 기표(시니피앙)의 절대 자유다.
어떠한 약속도 상징도 아니면서 주체를 다 담을 수 있는 그런 몸짓을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수신자의 감수성에 귀착된다.
상상해 보라.
만일 어떤 사람이 흘러가는 바람결에 코와 귀를 기울이어 천 리 밖에 피어 있는 한 그루 난초꽃을 찾아낼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다면
한 덩이 돌멩이를 앞에 놓고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 작품에서 꿈꾼 목계(木溪)의 수신 기능은 이런 감각적인 감수성은 아니다.
우리의 눈이 빛을 받아들이듯이 그냥 그렇게 환하게 열려 있는 어떤 영적 안테나라고 할 수 있을까.
시공을 초월해서 교통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이다.
이런 기능인들에게는 시니피앙의 절대 자유가 허용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불입문자(不立文字)라는 것도 아마 그런 것이리라.

내가 꿈꾸는 선계(仙界)에서도 생성과 소멸의 대원칙이 지배한다.
다만 그 주기가 지상과 같지 않을 뿐이다.
생성과 소멸은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역동적 장치다.
만일 생성만의 세계가 있다면 그 세상은 소멸만의 세계가 지닌 공허감보다 더 견디기 힘든 답답하고 울적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영원한 생명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지리하고 멋없는 정황인가.
내가 꿈꾸는 낙원에도 생명은 유한하다. 다만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다 갈 수 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자유인가.

생명의 동력은 물이며 소멸의 매체는 불이다.
초공(草公)의 '一'자는 무궁한 생성의 근원인 물을 노래한 것이고,
모공(毛公)의 '一'자는 끝없는 소멸의 메신저인 불을 노래한 것이다.
생명은 소멸에 이르고, 소멸은 다시 생명을 낳는다.
둘은 고리를 이루어 돌고 돌아 앞뒤가 없다.

화자를 제외한 등장 인물들은 다 선인(仙人)이다.

5

꿈꾸는 행위―이 역시 지상적 삶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지상적 삶에 대한 엄살이 꿈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떤 시도 엄살 아닌 것은 없다.
외견상 아무리 으젓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시라도 조용히 들여다보면 그 바닥엔 엄살이 감추어져 있다.
시는 '엄살부리기'다.
그러나 '아름다운 엄살부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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