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읽기

[스크랩] 계란 한 판 / 고영민

운수재 2007. 4. 12. 09:11
 

계란 한 판

                             고   영   민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짧은 침묵)

계란 한 판…(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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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공은 깊은 사찰의 선방이나 상아탑의 연구실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행상인의 목소리도 수십 년 닦이다 보면 사람의 귀를 잡는 힘을 얻는가 보다.

달걀장수의 멋들어진 '생계의 운율'도 기발하지만

그런 소재로 시를 만들어 낸 시인의 독공도 참 가관이다.

운수재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운수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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