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의 「만리성(萬里城)」 / 임보
밤마다 밤마다
온하로밤!
싸핫다 허럿다
긴萬里城! ―「萬里城」전문
「만리성」은 김소월(1902~1934)의 시 가운데 가장 짧은 작품이다. 4행이지만 전 6음보 총 20음절에 불과한 단시다. 작품의 길이는 짧지만 그 속에 서려 있을 화자의 심리적 갈등의 폭을 펼쳐 보인다면 아마도 ‘만리’를 능가할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25년 1월 1일『동아일보』신년호 지상이다. 「千里萬里」「남의나라」등 6편이 동시에 발표되고 있다. 12월에는 그의 처녀시집『진달래꽃』이 상재되기도 했으니 1925년은 그에게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소월의 작품 발표 시기는 1920년으로부터 1926년으로 압축되는데 「만리성」이 발표된 1925년 초는 그의 작품 활동의 후기에 속한다.(그가 시창작에 몰두했던 시기는 1922~24, 약 3년간으로 추정된다.) 그는 1926년 이후 거의 절필을 하고 시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된 중요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가 시를 버린 것은 시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은 우리에게 그것을 넌지시 암시해 주고도 있다.
「만리성」은 장차 그의 삶의 진로를 바꾸게 한 정신적 고뇌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화자는 거의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샌다. 전전반측 이 궁리 저 궁리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처럼 불면케 했던가. 고뇌의 요인이 될 몇 가지 가족사적 사건들을 들추어보도록 하자.
1904년(2세) 그의 부친 공주 김씨 성도(性燾)는 일인(日人) 노동자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 이상자가 된다. 그는 평생 회복되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산다.
1916년(14세) 오산학교 재학시 조부의 강요에 의해 남양 홍씨 단실과 결혼한다.
1923년(21세) 배재고보를 졸업한 소월은 동경 상대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다.
1924년(22세) 조부를 도와 정주군(定州郡) 남단동(南端洞) 향리에서 지내다, 이윽고 처가가 있는 구성군(龜城郡) 평지동(坪地洞)으로 분가해 나간다. 아마 조손간의 갈등과 고부간의 불화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때 이미 그는 2녀 1남을 거느린 가장이었다.(그는 장차 2녀 3남을 두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빚어진 문제점들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한 완고했던 조부와의 갈등, 정신장애자인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부담, 무식한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고부간의 불화, 3남매의 가장 그리고 공주 김씨 종손으로서의 책임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에 대한 자책,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부터 오는 불안감, 문학 행위에 대한 회의, 유린당한 망국민으로서의 수치심 등 얼마나 많은 번뇌들에 사로잡혔을 것인가.
그는 이러한 고뇌의 요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혼자서 전전긍긍 모색했을 것이다. 그가 그동안 매달렸던 시의 길도 그의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책이 못된다고 판단했으리라.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생활’이었던 것 같다. 시보다는 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스승 김억은 소월을 추모하는 글에서 그를 이지적인 사람으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소월이는 순정(殉情)의 사람은 아니외다. 어디까지든지 이지(理智)가 감정(感情)보다 승한 총명한 사람이외다. 그리고 소위 심독(心毒)한 사람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사물에 대하여 이해의 주판질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외다. 다른 사정도 없는 바는 아니었거니와 이 시인이 시작을 중지하고 달리 생활의 길을 찾던 것도 그 실은 시로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이지에서외다. 동경 가서 문과에 들지 않고 상과(商科)를 택한 것도 또한 그것의 하나외다. 그리고 아무리 감정이 쏠린다 하드래도 이지에 비치어보아서 아니다는 판단을 얻을 때에는 이 시인은 언제든지 고개를 흔들며 단념하던 것이외다. 강직(剛直)하였습니다.
―김억「요절한 박행 시인 김소월의 추억」부분
그가 매일밤 잠 못 들며 궁리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조부처럼 일확천금의 노다지를 찾는 광산의 꿈을 꾸었을까. 수많은 소작인들을 거느리는 지주(地主)의 꿈을 꾸었던 것일까. 아니면 배를 몰고 해외를 드나드는 거상(巨商)의 꿈을 꾸기라도 했을까. 그러나 그런 꿈들은 그야말로 부질없는 허황된 몽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는 매일 밤 만리성을 쌓듯 끝없는 궁리를 하면서 생활의 방도를 모색했으리라. 그리고 1926년 드디어 그는 전재산을 쏟아 하나의 사업을 선택한다. 그것은 구성군 남시(南市)로 나와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유년의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사랑만 받고 자랐던 내성적인 소월에게 사업적인 기질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신문구독자도 많지 않았던 당시의 어려운 여건에서 순박한 한 시인이 지방의 신문사 지국을 운영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는 몇 년 지탱하지 못하고 손을 털고 일어선다. 그리고 식솔의 생계를 잇기 위해서 드디어는 고리대금업에 손을 대야만 하는 참담함에 이른다. 그의 생활에 대한 실패는 그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했고 1934년 마침내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다.
「만리성」은 소월의 이러한 비극적인 생애의 전조(前兆)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그가 밤마다 쌓았다 헐었다 했던 그 ‘만리성’은 정신적인 고고한 성이 아니었다. 불후의 거작에 대한 방대한 구상이나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대한 심원한 사색이라기보다는, 사업 곧 어떻게 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새삼 그의 인간다운 고뇌에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겨우 6음보의 짧은 가락 속에 설부진(說不盡)의 무궁한 궁리와 고뇌를 담아 표현하고 있는 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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