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감상

김종삼의 <시인학교>

운수재 2006. 5. 26. 21:45


金宗三의 「詩人學校」/   임보



시인은 어느 시대·어느 사회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현세적·지상적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톨박이다.
말하자면 세상과의 궁합이 맞지 않는 잘못 태어난 외로운 족속들이다.
그래서 자기는 천계의 신선이었는데 잘못해서 이 지상에 잠시 귀양온 적선(謫仙)이라고 자위하기도 하고,
혹은 이 현상의 세계 저 너머에 새로운 본향(本鄕)이 있다고 믿고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아무튼 현세와 화목하기 어려운 시인들은 세상을 향해 더러는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혹은 백일몽을 꿈꾸며 불만스러움을 달래기도 한다.
「시인학교」는 김종삼(1921∼1984)의 꿈의 기록이다.
그가 상상 속에서 빚어 만든 유토피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公告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산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게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김종삼 「시인학교」전문

시의 내용은 이렇다. 학교에 등교를 했더니 게시판에 <공고>가 붙어 있다.
오늘 강사진(라벨, 세잔느, 파운드)이 다 결강이라고―.
그러자 학생인 김관식이 욕설을 퍼부으며 교실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김소월과 김수영은 이미 휴학게를 내고 학교에 나오지 않고,
전봉래와 김종삼 자신은 바하의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며 소주를 나눈다.
학교는 지중해 동쪽 연안에 자리한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다.

김종삼은 그의 이상향을 하나의 학교로 설정했다.
중년 이후에 접어들어 인생을 돌이켜보며 가장 아름다웠던 때가 학창시절이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약간의 과제물들 때문에 더러 시달림을 당하긴 했어도 그래도 별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때가 바로 학창시절이 아니던가.
세상과의 갈등 속에서 언제나 소외와 패배만을 맛보았던 그는 유년의 학창시절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이상향을 학교로 삼았으리라.
그 학교는 세속적인 인간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시인만의 성지다.
시인들 가운데서도 그가 좋아하는 시인들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강사들 역시 그가 좋아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들로만 구성된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몇 가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천재성과 비극성이다.
그들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인데 그들이 이 지상에 머물고 있을 때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다간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프랑스의 작곡자 모리스 라벨은 그가 만든 감미로운 곡들과는 달리 교통사고로 정신장애에 시달리다 불행하게 갔다.
후기인상파의 거장 폴 세잔느는 미술학교에 낙방했는가 하면, 화랑으로부터 그의 작품이 거절당한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세기의 대표적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는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고 떠돌이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김관식, 김소월, 김수영, 전봉래 등도 다 천재적인 기질을 타고난 시인들인데 세상과 잘 타협이 되지 않아 불행하게 살다 갔다.
술로 몸을 망치기도 했고 젊은 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러나 눈먼 세상 사람들은 이 천재들이 지상에 머물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그들이 세상을 뜬 후에야 비로소 보게 된다.

김종삼은 「시인학교」속에서 자신을 이들 불우한 천재 시인들과 나란히 놓음으로 자신의 지상적 불우성을 자위코자 했으리라.
또한 이 작품은 자신의 가치를 미쳐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세상 사람들을 비웃는 냉소를 담고 있기도 하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아무리 명강사들의 흥미로운 강의일지라도 역시 학생들의 평화는 수강보다는 휴강에 있다.
그래서 김종삼은 강사들을 결강시킨다. 교실 내에 쌓인 먼지가 두터운 걸 보면 이 학교에서의 휴강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아마 다반사인 것 같다.
수강의 번거로움에서도 해방된 채 다정다감한 친구들과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술을 마신다.
조금 있으면 이미 방송실에 신청해 놓은 그가 좋아하는 바하의 부란덴부르그 협주곡 제5번이 흘러나올 것이다.
교실 창 밖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의 자연이 펼쳐져 있다.

김종삼은 술을 좋아했다.
특히 안주도 없이 소주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술로 몸을 망쳐 의사의 금주령이 내렸을 때도 그는 가족들 몰래 술을 마시기 위해 집을 뛰쳐나오곤 했다.
문우들에게 술값을 구걸하기도 하고 술값이 없으면 가게에서 소주를 훔치기도 했다니 얼마나 술을 좋아했던가 짐작이 간다.
그는 또한 음악을 좋아했다. 특히 바하와 모차르트를 좋아했다.
누가 그에게 죽음이 무엇인가 물으니 '모차르트를 못 듣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그는 음악광이었다.

「시인학교」는 김종삼이 시공을 초월해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끌어다 세운 이상 공간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레바논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음식 소주를 홀짝이며, 또한 그가 제일 좋아하는 바하의 음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 정경을 상상해 보라. 바로 이것이 김종삼이 꿈꾸는 소박한 유토피아다.



* 작품 「시인학교」는 김종삼의 제2시집『詩人學校』(신현실사, 1977)에 수록되어 있음.